[새로운 고향을 찾는 방랑자]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를 다시 읽으며
방랑길에서
-크눌프를 생각하며
슬퍼하지 마라. 곧 밤이 오고,
밤이 오면 우리는 창백한 들판 위에
차가운 달이 남몰래 웃는 것을 바라보며
서로의 손을 잡고 쉬게 되겠지.
슬퍼하지 마라.곧 때가 오고,
때가 오면 쉴테니. 우리의 작은 십자가 두 개
환한 길가에 서 있을지니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이 오고 가겠지.
- 헤르만 헤세
우리나라의 독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독일 작가는
단연 헤르만 헤세입니다.
왜 헤르만 헤세에 사람들은 매료가 될까요?
그것은 그 작가가 한결같이 깊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갈구하는
모습과 한결같이 주제와 사상의 일관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인 [데미안]입니다.
청소년기의 방황과 성장을 다룬 소설이지만
마치 우리 젊은 날을 마치 영화처럼 그대로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명작입니다. 나는 이 데미안을 7번이나 읽어 보았습니다.
<<에브리원 독서클럽에 데미안의 문학비평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예상외로 드뭅니다.
특히 [수레바퀴 밑에서] 나 [ 크쿨프]를 읽어본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독서습관은 가장 유명한 책만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헤세를 제대로 모르는 결과를 낳습니다. 헤세를 알려면 적어도 그의 작품을 3권은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데미안과 더불어서 헤세의 걸작중의 하나는 [크눌프]입니다.
크쿨프, 그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고향을 찾는 방랑자] 라고 부릅니다.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인간은 방황하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싶어졌습니다.
나도 물론 청소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많은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방황과 방랑을 통해서 나의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사실 직선적인 인생은 거의 없습니다.
인생은 구비 구비 곡선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크눌프라는 작품은 3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입니다.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그리고 종말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세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글들만 간추려 보았습니다.
초봄
고독한 방랑자 크눌프는 몇 주 동안 병원에 누워있다가 나왔다. 퇴원했을 때가 2월 중순경이었으니 아직 날씨가 고약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든 크눌프를 맞아준다면 그것을 일종의 영예로 여겨야 할 것이다. 처음으로 그가 기억해 낸 사람은 레히슈테텐에 살고있는 무두장이 에밀 로트푸스이다. 서풍이 불어대고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저녁에 불현듯 들이닥친 크눌프를 신혼의 로트푸스는 더할나위없이 반갑게 맞이한다.
레히슈테텐의 원하지 않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방랑자 크눌프의 삶에서 두드러진 것이라고는 방수포 덮개로 곱게 포장된 여행수첩이다. 그 안의 공식증명서가 그의 삶을 대변해주며 온갖 수단을 다해 위태위태한 허구의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간다. 유쾌하고 명랑하며 때때로 정신적으로 탁월하고 진지하기까지 한 크눌프에게 경관들도 관대하다.
로트푸스의 집에서 머물던 크눌프는 그의 아내가 던지는 도발적인 추태를 단칼에 끊어낸다. 대신 슈바르츠바트에서 온 이웃집 하녀 베르벨레에게 끌리는 마음을 느낀다. 견습공 침대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바라본 이웃집 하녀 베르벨레의 고단한 하루를 생각하니 안쓰러워 위로해주어야 겠다고 마음 먹고 자신을 추스린다.
다음 날, 재단사 슐로터베크에게 실과 바늘을 구해 자신의 양복을 수선한 크눌프는 한때 슐로터베크가 지녔던 뜨거운 신앙심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 다섯아이를 키우며 삶의 무게에 짓눌린 그에게 자그마한 보탬이라도 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고민하던 크눌프는 맑은 눈으로 친구의 얼굴을 보며 "그러니까 자네는 이제 자식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가?" 라는 선문답을 던진다. 하느님의 사랑, 그 안의 모두는 하나, 또는 같다는 메세지인가.
로트푸스 아내의 추파를 피해 레히슈테텐을 떠나기 전 크눌프는 베르벨레를 만나 사랑과 진실을 담아 이야기한다. 낯선 남자의 호의에 경계하던 그녀도 곧 진심을 깨닫고 마음을 열게되는데 제한된 짧은 시간에 게르텔핑엔의 술집 <사자>에 가서 춤도 추고 헤어지기 아쉬운 두사람은 짧은 입맞춤을 한다. 내일이면 크눌프는 이곳에 없다. 베르벨레의 향수병도 사라진다.
작은 창 유리를 통해 가느다랗고 희미한 햇빛이 거실 안으로, 식탁 위와 카드 위로 흘러 들어왔다. 햇빛은 마루 바닥 위에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변덕스럽게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다가, 푸른빛 천장에 이르러 소용돌이치며 전율하였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즐거운 청년 시절이 한창이던 때, 크눌프도 아직 살아있던 때의 일이다. 그때 우리는, 그러니까 그와 나는 태양이 작렬하는 여름에 비옥한 지역을 두루 여행하고 다녔고 근심도 거의 없었다. 하루 온종일 우리는 황금빛 밀밭가를 거닐거나, 선선한 호두나무 아래 혹은 숲 가장자리에 누워 지냈다.
소녀들 사이에서 갈색빛 얼굴에 광채를 발하던 크눌프. 뜨거운 뙤약볕을 피해 숲 가장자리 나무그늘을 찾으며 여행하던 나와 크눌프는 어느 날 크눌프가 묘지에서 밤을 보내자는 의견을 내고 앞장서자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따르기로 한다. 우리는 그 밤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것에는 종말이 있다고 말하던 그에게 나는 결혼을 예로 들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한다거나, 우정을 맺는다거나 그럴 경우엔 그것이 오래 지속되고 금세 종말을 맞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아름다운 법이니까" 하지만 크눌프는 불꽃놀이를 말한다.
부드럽고 매혹적인 형형색색의 불꽃이 어둠 속으로 높이 솟아올랐다가 금세 그 속에 잠겨 사라져버리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안타깝게 그리고 더 빠르게 사그라져 버려야만 하는 모든 인간적 쾌락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눌프는 묘지의 밤이 잠길 무렵 동화같은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꿈에서 그는 첫 여인 헨리에테와 두번째 여인 리자베트를 만났다. 하지만 꿈 속 배경 어릴적 옛집을 보면서도 부모를 찾지 않은 자신을 책망한다. 부모님들은 자신을 사랑하지만 크눌프는 그들에게 낯설고 이상한 존재였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에게 사상가나 교수가 되어보라고 권했다. 그는 구세군이 되고 싶다 한다. 차라리 성인이 되어보라는 조롱에 생각과 행동이 정말로 진실하다며 거룩한 거라고 대꾸한다. 그에게는 짙은 고독의 향기가 난다.
종말
꽃들은 모두
안개 자욱해지면
시들어야 하는 운명,
인간 또한
죽어야만 하리니,
무덤 속에 눕게 되리.
인간 또한 꽃과 같아,
봄이 오면
그들은 모두 다시 살아나리라,
그때는 더 이상 아프지 않으리,
또한 모든 것 용서 받으리.
크눌프는 헤세의 분신입니다.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헤세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 종말에서 크눌프는 신과 교감을 나눕니다.
이곳과 저곳이 다르지 않음을 애써 표현하려는가 봅니다.
방랑자 크눌프를 통해 헤세는 몸과 마음, 정신
그리고 영혼의 '자유'를 울부짖습니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인생이 실패자라고 자책하는 크눌프를 위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마지막 부분이 너무나 좋아서 몇번이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긴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헤세의 고향은 칼브입니다. 칼브는 남독일의 작은 마을입니다.
그는 나중에 국적을 스위스로 바꿉니다.
나중에 자신은 아들과 함께 고향 칼브를 다시 찾습니다.
수많은 방랑과 방황끝에 다시 찾은 고향 칼브에서 그는 자신이 마치
크눌프가 된 것 같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시인이자 방랑자인 크눌프는 안락하고 평안한 삶의 거부자였습니다.
고향을 떠났지만 여전히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크눌프...
우리에게도 고향이라는 것은 언제나 소중한 곳이며,
추억이 묻어난 곳이며,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고향을 찾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세대들은 [고향상실]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고향이 없는 세대]가 앞으로 미래세대의 지배세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고향을 찾아나설 것입니다.
새로운 고향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을것이며,
새로운 이웃이 되는 세계를 지향하고 있을 것입니다.
크눌프를 아직 안읽어 본 사람은 헤세를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크눌프는 곧 헤세의 분신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부터 100여년전에 나온 이 책의 주인공 [크눌프]
는 충분히 우리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고향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곳을 고향을 찾아서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고 있는 듯한
인생이 어쩌면 우리들인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안정과 평안한 삶을 거부하는 크눌프
반대로 육신의 안정과 평안을 구하면서도
아직은 뭔가 부족하고 허전함을 크게 느끼는 우리들...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시간을 내어서 [크눌프]를 읽어보기를 강권합니다.
뭔가 내 안에서 뭉클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글출처 이미지 - 방황하는 나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