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명길묻27,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인문학적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12.
728x90
반응형
SMALL



헤르만 헤세의 불후의 명작 [유리알 유희]

“진리는 분명 있네.
그러나 자네가 바라는 ‘가르침’,절대적이고 완전하고
그것만 있으면 지혜로워지는 가르침이란 존재하지 않아.
자네는 완전한 가르침이 아니라 자네 자신의 완성을 바라야 하네.”
<<유리알 유희>> 중에서


헤르만 헤세의 불후의 명작 [유리알 유희]에 나오는 가장 멋진 대목이다.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는 평생 진리에 대한 추구나 열정은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며, 또한 지식과 정보를 이용할 줄 아는 지혜자로서 삶을 지향해야 하며, 그러면서 자기 완성이나 자기 완덕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도 배운다. 헤르만 헤세는 평생을 구도자의 자세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의 책들은 한결같이 높은 수준의 지적, 정신적 높이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냥 읽혀지지 않는다. 소위 ‘헤세가 숨겨 놓은 시크릿 또는 코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를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처음 읽었던 책은 [데미안]이었다. 문학을 하신 선생님의 권유로 읽었다.나의 문학적 충격은 그 때 [데미안]을 읽으면서 생겨난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 마치 데미안의 친구 싱클레어와 나의 처지가 마치 비슷하게 느껴졌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상당히 어두웠다. 마음은 늘 불안하고,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유약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책이 나에게 위안’을 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명작에서 길을 얻는 자가 된 것이다. 10대와 20대에 읽은 책들은 앞으로의 인생에 길잡이가 되고, 등대나 등불이 된다.

 

  • 구글출처 이미지 범우사 출판


그 후 기회가 되면 헤르만 헤세의 책들을 읽는 것에서 많은 위안을 얻었다. 헤르만 헤세는 학력이 중학교 밖에 되지 않고, 철물공장에서 일을 했으며, 신학교에 갔지만 자유를 찾아서, 낭만을 찾아서 탈출하였다. 그의 소설들의 특징은 탄생과 성장 그리고 방황과 갈등, 일탈과 탈출, 그리고 죽음과 내세에 대하여 써나간다.

그가 쓰는 소설 작법은 정말 한 인생을 통째로 조명하는 것 같으며, 지극히 인문학적인 노력과 열정이 담겨 있다. 때론 그의 소설에서 프로이드나 융이 보이고, 피카소와 샤갈이 보인다. 부처와 예수도 보이고,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지만 지혜롭고 현명한 노인의 모습도 보인다.

그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한 인생의 전반적인 것을 담는다. 아마도 싯타르타의 [생노병사]에 대한 가르침에 철저히 따르고 문학속에 그러한 세계를 설정한 것 같다. 인생을 단편으로 보면 희극이지만 장편으로 보면 비극이 된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은 상당수 비극의 색채와 냄새가 강하게 난다. 그래서 사람들은 헤세의 소설들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우울한 사람들에게 우울한 음악이 더욱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울하고 어두운 정서를 가진 사람이 헤세의 책을 읽고 다시 일어날 힘과 위로를 얻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헤세의 책은 읽으면 읽을 수록 [독서치료]를 경험한다. 처음에는 고단하고 힘든 책읽기가 되지만, 나중에는 그의 책이 주는 중압감과 중독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만큼 그의 책은 슬픔에서 기쁨을 주고, 어둠에서 빛을 발견하는 듯한 카오스적 현상을 경험한다.


오늘의 소개할 책은 [유리알 유희]이다. 이 책을 대학시절에 읽었지만, 그 뒤로 오랜만에 읽게 된 책이다. 물론 나에게 가장 탁월한 대화자중에 하나인 여성분을 통해서 [유리알 유희]가 주는 감격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독일의 문호 헤르만 헤세의 작품 세계는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15년까지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같은 신낭만주의 경향의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집권까지인 중기에는 헤세 작품에 결정적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때 그는 반전 메시지가 담긴 글을 발표하여 당시 독일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정신분석학적 치료를 받는다. 이 시기의 대표작이 『데미안』, 『황야의 이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이다. 후기 대표작은 『동방순례』와 『유리알 유희』인데, 특히 『유리알 유희』는 그가 10여 년에 걸쳐 집필한 마지막 역작이다.

무려 10년동안 쓴 그의 작품은 2차 대전 이후에 출간되었고, 나중에는 노벨상까지 타게 된 수준 높은 책이다. 물론 그 상을 받게 도와준 인물이 나는 ‘히틀러’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잘못과 야욕을 헤세는 문학을 통해서 고발한다. 잘못된 광기를 가진 지도자의 야망앞에 도전장을 던지며 ‘인생 똑바로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그는 책을 통해서 전달한 것이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 최대의 비극을 몰고 온 정신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욕망과 금욕, 혼돈과 질서,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선과 악 등 양극의 문제를 풀기 위한 평생의 고민을 『유리알 유희』 속에 풀어 놓았다. 따라서 이 책은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요 방법론”으로 볼 수 있다.

작품에서의 유리알 유희란 평소 헤르만 헤세 스스로가 내면세계에 심취하여 명상하고 사색했던 “생각의 유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유희적 존재라고 하는데, 헤르만 헤세는 높은 수준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유희를 추구한 인물이다. 이런 유희를 통해 예술과 학문의 극단성을 멀리하고, 삶의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헤세에게는 유희 자체가 과정이자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삶을 즐기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헤세는 삶의 유희 그 자체를 즐기고, 그 유희를 목적으로 하여 인생의 답을 정한 인물이다. 나는 이 헤세를 통해서 ‘유희함으로 자유하였다’ 라고 봅니다. 호이징가가 ‘유희적 인간,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면, 헤세는 말과 글로 펼쳐지는 문학의 세계에서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헤세의 책은 천천히 읽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그 책의 가치와 크게 만나게 된다. 급하게 읽으면 한없이 어렵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책이다.


 
 
  • 다음 출처 이미지 - 보석상자의 사진 인용


헤세는 젊은 날 동양사상과 불교에 심취하였다. 물론 그 집안에 불교에 정통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헤세의 작은 아버지였다. 그는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학문에 친숙했고, 나이가 들수록 그 정신문화에 심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리알 유희’의 방법론에서도 그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리알 유희』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헤세의 고민과 그만의 답을 찾아가는 방법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다.

작품에서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 자체가 그 바로 그 과정이자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요제프는 그 무엇에 대한 고민도 없이 학업에만 열중하다가, 점점 세상에 대해 눈뜨고, 자신과 우주를 둘러싼 고뇌를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그는 남과는 다른 정서와 관념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결국 유희 명인이 되어 모든 양극적 요소를 통합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직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좀 더 나은 방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이렇듯 한 단계씩 도약하여 마침내 가장 높은 수준으로 통합되는 소설의 내용은, 3중 구조로 조직된 소설의 형식과도 완벽한 일치를 보인다.

또한 『유리알 유희』는 1943년에 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도 중요한 화두인 지식 정보 사회, 멀티미디어, 판타지, 가상현실, 정신 건강과 명상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현대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은 그래서 [고전적인 미래서적]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는 이 [유리알 유희]의 작품을 최고의 현대고전으로 뽑는데 주저하지 않는다.지금 이 책을 어느 누군가를 통해서 다시 보게 되었다.

25세기의 미래, 한 전기 작가가 200년쯤 전에 살았던 요제프 크네히트라는 지식인의 전기를 작성한다. 당시 유럽 중부에는 카스탈리엔이라는 지방이 있었다. 카스탈리엔은 영재를 교육하고 지성인을 양성하는 학문 연구의 공간으로, 주변국들의 정치적 협의를 통해 생성된 완전한 중립지대이며 구성원들은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한다.(이 카스탈리엔은 사실 헤세가 찾은 스위스의 전원적인 마을의 이름이다. 헤세는 이 마을을 자신의 작품속에 투영시켜서 그 마을을 유명하게 만든다.)

작은 도시의 라틴어 학교에 다니는 학생인 요제프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에서 온 음악 명인을 만나 시험을 치르고 카스탈리엔의 에쉬홀츠 학교에 입학한다.
크네히트는 청강생으로서 카스탈리엔 교육을 체험하러 온 플리니오 데시뇨리를 만나 우정을 나누는데, 카스탈리엔의 정신적이고 학문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크네히트와 부와 명예, 권력 등 세속의 가치를 대변하는 데시뇨리는 논쟁과 토론을 거듭한다. 이후 크네히트는 ‘숲 속의 방’이라고 불리는 카스탈리엔 상급학교 발트첼로 진학하고, 데시뇨리는 카스탈리엔을 떠나며 두 사람은 헤어진다.

발트첼은 유리알 유희 교육을 매우 중시하는 학교로, 본디 음악에 더 관심이 있었던 크네히트도 점차 유리알 유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발트첼을 졸업하고 교육청의 임용을 기다리며 연구생으로 지내던 시기, 크네히트는 노형이라는 사람을 만나

중국어를 비롯해 주역의 상징과 해석을 배운다. 그 후 카스탈리엔의 수도회에 입회해 베네딕투스 수도회가 운영하는 마리아펠스 학교에서 유리알 유희를 가르치도록 발령을 받은 크네히트는 이곳에서 역사학자 야코부스 신부를 만난다. 야코부스와의 만남은 속세와 학문에 대한 크네히트의 가치관을 상당히 변화시킨다.
카스탈리엔으로 돌아온 이후 크네히트는 유리알 유희의 축제인 대유희에 참가하는 등 탁월한 유희자가 된다. 교황직과 흡사한 ‘유희 명인’이 사망하자 크네히트는 선거를 통해 새로운 명인이 되고, 명인 크네히트가 처음으로 주최한 연례 유희는 대성공을 거둔다.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이 속세와 철저히 격리되어 엘리트 교육만 추구하는 실상에 차츰 염증을 느끼게 된다. 결국 크네히트는 8년 만에 명인직에서 물러나 속세로 돌아오고, 정치가가 된 데시뇨리의 아들 티토의 선생이 된다. 티토를 가르치며 데시뇨리와 아들의 관계를 이어주던 그는 티토와 단둘이 산 속의 별장을 찾았다가 차가운 호수에서 티토와 수영을 하던 도중 숨을 거둔다.
주인공의 죽음에 허무함도 느끼지만, 어차피 인생이 허무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헤세는 그 소설속에 투영시킨다.
사람이 노력하고 분주하게 바쁘게 살지만 그래도 생각해 볼 겨를이나 여유(旅遊)를 갖지 못한다면 ‘유희적인 삶’의 내용은 없는 것이다. 인생이 만남이고 만남의 가치가 양이 아닌 질에 있다면, 의미 있는 인생이란 깊이 있는 교제와 그 만나는 사람에 대한 깊고 풍성한 앎에 있을지도 모른다.

헤세를 만난다는 것은 헤세를 아는 것이다.
여기서 아는 것이라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다는 것’은 두 세계의 존재에서 오는 갈등과 모순을 넘어서 화합과 공존에 대한 모색을 하며 자아발견의 길로 가는 것이며,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깊숙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헤세문학은 위에서도 밝혔듯이, 자아의 성장과 갈등, 고민과 고뇌, 그리고 성찰과 반성 그리고 생의 강렬한 의지를 담는다.

그래서 헤세문학을 만나면 마치 거대한 숲에서 나 자신이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서 숲 밖의 풍경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또한 깊은 물과 같아서 아무리 퍼 올려도 사그러들거나 마르지 않는 풍족함을 경험한다.

  • 다음 출처 이미지 - 헤르만 헤세의 좋은 문구 - 융툴에서 발췌
  • 다음 출처 이미지 - 서재의 유리알 유희


작품 속 명문장을 잠시 나눈다.


“페로트는 구슬들을 꿰어 늘어놓아 만든 아이들용 계산 기구를 본떠 수십 개의 철사 줄이 쳐진 틀을 하나 짜고, 그 줄에 크기와 모양과 색깔이 각기 다른 유리알들을 나란히 꿰어 늘어놓았다. 철사 줄은 악보의 오선이고, 유리알은 음표에 해당하는 셈이었다. 이렇게 그는 유리알을 사용해 음악적인 인용을 나타내고, 머릿속에 떠오른 주제를 구성하고 변조하고 발전시켰으며, 다시 전개해 다른 것들과 대비시키기도 했다.” 《유리알 유희 1》, 민음사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삶은 전체가 하나의 역동적인 현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근본적으로 그 역동적 현상의 미학적인 측면을 파악하는 것이고, 그것도 주로 리드미컬한 진행 과정이라는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다.” 《유리알 유희 1》, 민음사


“다만 저는 야코부스 신부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동안, 나는 카스탈리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 세계가, 전 세계가 나와 관계되어 있고 내가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리알 유희 2》, 민음사

 



명작에게 길을 묻다 라는 시리즈는 계속된다. 여전히 내가 읽어야 할 명작들은 수두룩하다. 명작을 읽는다는 것은 전 인류가 누릴 수 있는 대단하고 장엄한 지적 유희이자, 새 노래이고, 사람을 진보시키는 창조적인 원동력이 된다.

  • 스위스 여행중인 헤세와 그의 무덤 / 구글출처 이미지

 

 
728x90
반응형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