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가르침은 놀랍고 기억에 남는데, 다양한 교육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가 가르친 내용, 즉 그가 성육신한 신성한 주님이시며 하늘 왕국을 이 땅에 가져오셨다는 것과, 이 왕국의 규칙은 이 땅의 왕국의 규칙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요약
예수님은 그분의 가르침으로 유명하셨는데, 그분이 사용하신 방법과 전하신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사역 내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그 방법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강렬하면서도 기억에 남고, 이해하기 쉽고 동시에 도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방법들에는 당시 잘 알려진 방법뿐 아니라 시, 잠언, 과장, 비유, 직유, 수수께끼, 역설 등 우리에게도 친숙한 특징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르침을 다른 가르침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으며, 성육신하신 신성한 주님으로서 자신이 그 나라의 통치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나라는 인간 나라의 기준에 도전했고, 그 시민들에게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살 것을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는 능력으로 유명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분은 45번이나 "선생님"으로 불립니다.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랍비 교육을 받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람어 칭호인 "랍비"는 14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하고, 성경으로 가르침을 뒷받침하고,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고, 법적 분쟁에 대해 심문을 받으시고, 가르침을 더욱 기억에 남도록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골과 도시에서 모두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에서도 가르치셨고, 적어도 한 번은 배 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많은 군중을 모아 그분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음식의 필요성을 잊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그분이 가르치신내용뿐만 아니라가르치는방식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방법
예수님은 다양한 교수법을 사용하여 청중들에게 가르침을 각인시키셨습니다. 이러한 교수법은 그분의 의미를 명확히 하고, 듣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거나(때로는 충격을 주기도 하고),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의도를 드러내는 데 사용되었으며, 동시에 그분의 가르침을 기억에 남도록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시, 잠언, 과장법, 비유 등이 포함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유형이 있었습니다(말장난[마태복음 23:24], 직유[누가복음 17:6], 은유[마태복음 5:13-14], 수수께끼[마가복음 14:58], 역설[마가복음 12:41-44], 반어법[마태복음 16:2-3], 질문[마가복음 3:1-4]).마태복음 23:24], 비유[누가복음 17:6], 은유[마태복음 5:13-14], 수수께끼[마가복음 14:58], 역설[마가복음 12:41-44], 아이러니[마태복음 16:2-3], 질문[마가복음 3:1-4]).
시
예수께서 사용하신 시(복음서 기자들이 표현한 시)의 대부분은 병렬법을 포함하고 있으며, 복음서에는 약 200개의 병렬법이 있습니다. 병렬법에는 네 가지 주요 유형이 있습니다. 동의 병렬법, 반의 병렬법, 단계 병렬법(혹은 절정 병렬법), 그리고 교차 병렬법입니다.
동의어적 병렬 구조에서, 뒤따르는 행(들)은 앞 행과 유사한 (동의어적인) 생각을 표현합니다. 두 번째 행은 사실상 동의어일 수 있지만, 첫 번째 행을 명확히 하거나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동의어적 병렬 구조를 사용하신 예가 약 50가지 정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숨겨진 것이 드러나지 아니하고는 없고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아니하고는 없느니라"(마가복음 4: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숨겨진"은 "비밀"과, "나타난"은 "드러나다"와 평행합니다.마가복음 4:22). 여기서 “숨겨진”이라는 단어는 “비밀”과 유사하며, “나타난”이라는 단어는 “빛으로 드러나다”와 유사합니다.
반의적 병행법에서두 번째 행은 첫 번째 행과 대조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가장 흔한 병행법으로, 거의 140번이나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병든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느니라"(마태복음 7:17). "건강한"이라는 용어는 "병든"과, "좋은 열매"는 "나쁜 열매"와 대조됩니다.마태복음 7:17). “건강한”이라는 용어는 “병든”과 대조되고, “좋은 열매”는 “나쁜 열매”와 대조됩니다.
단계적(혹은 절정적)병렬 구조에서두 번째 행은 첫 번째 행의 사상을 이어가며발전시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러한 유형의 병렬 구조가 약 20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0:40)입니다. 첫 번째 행("나를 영접하는 자는")이 반복되고, 그 다음에 가르침을 발전시키는 요소가 추가된 것에 주목하십시오("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0:40). 첫 번째 줄이 반복된 것에 주목하십시오("나를 영접하는 자는"). 그리고 가르침을 발전시키는 요소가 추가되었습니다("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자는").
마지막으로,카이아스틱 병렬법은 병렬 진술(A, B,B1, A1)의 역전과 관련이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이러한 유형의 병렬법이 16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A]이 사람[B]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B1]이 안식일[A1]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27).마가복음 2:27).
잠언
예수님께서도 속담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속담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태복음 26:5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담처럼 예외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칼을 쓰는 자는모두칼로 죽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칼을 쓰는 데 익숙한 자들은 칼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속담의 진실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마태복음 26:52). 잠언의 경우처럼 예외는 제공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과장
과장은 기만적으로 사용되면 잘못될 수 있습니다. 특히 듣는 사람이 과장된 언어를 예상하지 못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윤리적 가르침에서 과장된 언어는 듣는 사람(또는 독자)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과장된 언어에는 과장된 진술과 과장법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과장법은 완성이 가능하지만(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과장된 진술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마태복음 5:29)라고 가르치셨을 때, 그러한 행동은 가능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과장법은 완성이 불가능한 과장된 진술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낙타를 삼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윤리적인 요점은 분명합니다.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다가 큰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은 듣는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는 강력한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눈을 제거하는 것이 지옥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눈을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영어: 마태복음 5:29) 그런 행동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 말씀의 원하는 의도가 아닙니다.그러나 과장법은 완성할 수 없는 과장된 진술입니다.예를 들어,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눈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낙타를 삼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윤리적 요점은 분명합니다. 큰 일을 하기 위해 작은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과장은 듣는 사람의 주의를 끌기 때문에 강력한 의사소통 형태입니다.또한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예를 들어, 눈을 제거하면 지옥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제거하는 것이 좋습니다.
비유
아마도 예수님의 가장 잘 알려진 가르침 방식은 비유일 것입니다. 비유는 그의 가르침의 약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최소 50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비유들은 예수님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오해받는 가르침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비유는 기본적으로 비교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화와 같으니"(마태복음 13:44). 따라서 "하늘나라는" "보물"에 비유됩니다(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는 비유의 요점이 비유 자체에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예: 천국에 들어가려면 무엇이든 희생해야 합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요). 다른 비유들(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땅의 비유,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는 듣는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다양한 비교를 설명하십니다. 비유는 종종 우화로 표현되지만, 비유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비유의 맥락(예수님께서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가?)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한, 비유를 현대적 맥락에 적용하기 전에 원래 청중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마태복음 13:44). 따라서 "천국"은 "보물"에 비교됩니다(어느 정도 유사점이 있음). 이러한 비유는 비교의 요점이 일반적으로 비유 자체에서 강조되므로 이해하기가 비교적 쉽습니다(예: 왕국에 들어가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희생하십시오. 그럴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비유(예: 씨 뿌리는 사람/땅의 비유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듣는 사람들에게 명확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다양한 비교를 설명하셨습니다. 비유는 종종 우화로 표현되지만 비유의 주요 아이디어를 비유의 맥락(예수께서 왜 비유를 말씀하셨는가?)에 따라 찾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또한 현대적 맥락에 적용하기 전에 원래 청중의 관점에서 비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메시지
예수님은 가르치는 방식뿐 아니라 가르치는 내용까지 완벽한 선생님이셨습니다. 다음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세 가지 중요한 주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 나라의 실체, (2) 하나님 나라 안에서 사는 것, (3) 하나님 나라의 주님.
하나님 나라의 현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 주제입니다.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메시지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마가복음 1:15; 마태복음 4:17, 23; 누가복음 4:43 참조)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복음서에는 예수님의 76가지 다른 왕국 말씀(그리고 평행 구절을 포함하면 100개가 조금 넘습니다)이 담겨 있습니다.왕국은 물리적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예수님께서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18: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따라서 왕국은 하나님의 주권 통치를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행사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 시작되었고 그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마가복음 1:15; 또한마태복음 4:17, 23;누가복음 4:43참조 ).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왕국 말씀 76가지(그리고 평행 구절을 포함하면 100가지가 조금 넘습니다)가 담겨 있습니다. 왕국은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18:3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왕국은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 통치를 최종적이고 결정적으로 행사하시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이는 예수님의 사역 중에 시작되었고, 그분의 재림 때 완성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왕이시며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분이라는 개념은 풍부하게 등장합니다(단 2:44; 시 22:27-28; 103:19).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왕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젠가 자신의 모든 백성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다스리실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전파하셨을 때, 유대인 청중들은 그분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다니엘 2:44;시 22:27-28; 103:19).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온 세상의 왕으로 자주 언급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언젠가 당신의 모든 백성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다스리실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전파하셨을 때, 유대인 청중들은 그분이 이스라엘과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이미)와 미래(아직) 모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현재의 실체(마 11:11; 12:28; 막 1:15; 9:1; 눅 11:2; 17:20-21)이자 미래의 소망(마 6:9-10; 7:21; 8:11-12; 막 14:25)입니다. 예수님(왕)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은 그 나라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세상에서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할 때까지 온전히 경험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왕이 다시 오실 때까지(예수님의 재림) 기다려야 합니다.마태복음 11:11; 12:28;마가복음 1:15; 9:1;누가복음 11:2; 17:20-21)과 미래의 소망(마태복음 6:9-10; 7:21; 8:11-12;마가복음 14:25)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왕)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왕국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왕국은 세상에서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할 때까지 온전히 경험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왕이 돌아오실 때까지(예수님의 재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라는 문구는 동의어로, 같은 현실을 나타냅니다. 이는 한 본문에서는 “하늘나라 ”(마태복음 5:3)라고 되어 있고 다른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누가복음 6:20)라고 되어 있는 평행 구절을 비교함으로써 입증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신성한 이름인 “하나님”을 대체합니다. 더 나아가 마태는 같은 맥락에서 두 용어를 서로 바꿔 사용합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가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마태복음 19:23-24). 또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는 교회(하나님의 백성)와 동일하지 않습니다.마태복음 5:3) 하지만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누가복음 6:20)입니다. "천국"은 신성한 이름 "하나님"을 대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마태는 같은 맥락에서 두 용어를 서로 바꿔 사용합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태복음 19:23-24). 또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통치)는 교회(하나님의 백성)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열국을 다스릴 다윗 왕조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모세보다 더 위대한 선지자로 오셨습니다(신명기 18:18). 그 역할 안에서 예수님은 왕국 시민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체계적인 윤리 체계를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일부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영원히 유효하지만(마태복음 5:17-20; 마가복음 12:28-34), 어떤 계명들은 폐지되었습니다(마태복음 5:31-42; 마가복음 7:14-23).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순종을 기대하시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순종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적인 순종, 심지어 동기를 포함한 순종까지도 요구됩니다(마태복음 5:3-8; 12:33-37; 23:35-36; 누가복음 11:33-36).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일부는 특정 개인에게만 구속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부유한 젊은 관원에게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마가복음 10:21)라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신명기 18:18). 그 역할에서 그는 왕국 시민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체계적인 윤리 체계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일부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율법은 영원히 유효하지만(마태복음 5:17-20;마가복음 12:28-34) 어떤 계명은 폐지되었습니다(마태복음 5:31-42;마가복음 7:14-23).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기대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해야 한다"(마태복음 5:48)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외적인 순종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동기를 포함한 내적인 순종도 요구됩니다(마태복음 5:3-8; 12:33-37; 23:35-36;누가복음 11:33-36).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가르침 중 일부는 특정 개인에게만 구속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부유한 젊은 관원에게 "가서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마가복음 10:21)라고 말씀하셨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하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침에서 사용하신 문학적 형태, 특히 과장법을 알아야 합니다(마태복음 5:33-37, 38-42; 7:1; 마가복음 9:43-48; 누가복음 14:26 참조). 둘째,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청년 관원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부와 소유물이 그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원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의미를 읽어내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피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6:20에서 예수님은 "가난한너희는 복이 있나 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단순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해석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마태복음 5장 3절의 병행 구절("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 니")은 그러한 편협한 해석을 금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윤리적 가르침은 주로 예수님의 제자들, 즉 이미 믿음으로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마가복음 9:43-48;누가복음 14:26). 둘째,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보편적인 적용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유한 젊은 관원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부와 소유가 그를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우상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원래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우리의 의미를 해석하고 싶은 유혹이 있지만, 피해야 합니다.누가복음 6:20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3)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순종이 아니라 새로운 태도(마음)라고 가르치십니다(마 15:11; 23:27-28).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막 12:29-31; 신 6:5; 레 19:18 참조)은 모든 하나님의 계명을 요약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합니다(마 7:12).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애정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해되어야 하며(마 25:31-46; 눅 6:27-28; 10:25-30),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마태복음 15:11; 23:27-28).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마가복음 12:29-31 ;신명기 6:5;레위기 19:18참조)은 모든 하나님의 명령을 요약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해야 합니다(마태복음 7:12).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애정이 아닌 행동으로 주로 이해되어야 하며(마태복음 25:31-46;누가복음 6:27-28; 10:25-30), 심지어 원수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님
오랫동안 기다려온 다윗의 혈통의 왕으로서 예수님은 왕국의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평범한 왕이 아닙니다. 그분은 "기묘자", "영원하신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불리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사 9:6)으로도 불리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주권과 신적 지위를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즉, (1) 그분의 칭호, (2) 그분의 말씀, (3) 그분의 행동입니다.(사 9:6)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주권과 신적 지위를 증명하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즉 (1) 그의 칭호, (2) 그의 말씀, (3) 그의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칭호들
예수님의 주권과 신성을 나타내는 여러 칭호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로 불립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대리자로 특별히 선택되고 구별되셨습니다(시 2:2; 18:50; 삼하 1:14; 단 9:25 참조). 예수님은 정치적 함의 때문에 이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시지만, 여러 차례 자신을 묘사하는 데 있어 이 칭호가 적절함을 인정하셨습니다(마가복음 8:27-30; 14:61-62).(시 2:2; 18:50; 삼하1:14;단 9:25). 예수께서는 정치적 함의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피하셨지만, 여러 차례 이 칭호가 자신을 묘사하는 데 적절하다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마가 8:27-30; 14:61-62).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하나님과의 친밀함(막 14:36), 특별한 봉사를 수행하도록 택함(마 16:16),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요 20:17), 그리고 (어떤 맥락에서는) 신성(요 5:17-18; 8:54-59; 10:30-33)을 강조합니다.Mark 14:36), election to perform a special service (Matt. 16:16), a unique relationship with God (John 20:17), and (in some contexts) divinity (John 5:17–18; 8:54–59; 10:30–33).
셋째, “인자”라는 칭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하시는 칭호입니다. 이 용어는 예수님의 인간성을 강조할 수 있지만, 다니엘 7장 13-14절과의 연관성을 고려할 때, 종말론적 통치자이자 심판자이신 분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마 10:23; 19:28; 25:31; 막 8:38; 13:26; 14:62 참조).Daniel 7:13–14, it should be understood as one who is the eschatological ruler and judge (seeMatt. 10:23; 19:28; 25:31;Mark 8:38; 13:26; 14:62).
넷째, 마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다윗 왕위의 정당한 상속자로서 예수님의 왕적 지위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메시아가 단순한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사실 다윗의 주님이심을 가르치십니다(마가복음 12:35, 37).Mark 12:35, 37).
다섯째, 예수님은 구약에서 야훼에게 사용되었던 "주"로 언급됩니다. 이 용어는 신, 인간 왕, 주인 등에게 적용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적용될 것으로 예상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에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마가복음 2:28).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42절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 이 칭호를 사용하십니다.Mark 2:28). Jesus uses this title in reference to himself inMatthew 24:42.
예수님의 신성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모세보다 더 크신 분으로서, 그분은 율법에 대해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셨습니다(마태복음 5:31-32, 33-37, 38-42; 마가복음 7:17-19). 만약 그분이 신성이 아니었다면, 자신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부적절하고 자기중심적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그분을 주님이자 구세주로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32-33; 11:6; 마가복음 8:34-38; 누가복음 12:8-9). 더욱이 그는 아브라함(요한복음 8:53), 야곱(요한복음 4:12), 모세(마태복음 5:21-48), 요나(마태복음 12:41), 솔로몬(마태복음 12:42), 다윗(마가복음 12:35-37), 그리고 성전(마태복음 12:6)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말합니다.Matt. 5:31–32, 33–37, 38–42;Mark 7:17–19). His words about himself would be inappropriate and self-centered if he were not divine. For example, he indicates that a person’s eternal destiny is determined by their rejection or acceptance of him as Lord and Savior (Matt. 10:32–33; 11:6;Mark 8:34–38;Luke 12:8–9). Furthermore, he states his supremacy over Abraham (John 8:53), Jacob (John 4:12), Moses (Matt. 5:21–48), Jonah (Matt. 12:41), Solomon (Matt. 12:42), David (Mark 12:35–37), and the temple (Matt. 12:6).
예수님의 행동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행적(시각적 가르침의 한 형태) 또한 그분의 신성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성전(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마가복음 11:27-33), 악령(악령을 쫓아내심; 마가복음 1:27, 32-34; 5:1-13; 누가복음 11:20), 사탄(그의 집을 약탈하심; 마가복음 3:27; 누가복음 11:21-22), 질병(병든 자를 고치심; 마가복음 1:29-31, 40-45; 2:10-12; 7:32-37), 그리고 안식일(주님이 되심; 마가복음 2:23-28)에 대한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신성은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그분의 고난, 부활, 예루살렘의 파괴), 사람들의 생각을 아는 능력(마가복음 10:21, 12:24),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죄를 용서하는 능력(마가복음 2:10, 누가복음 5:21-24)에서도 드러납니다.Mark 11:27–33) demons (by exorcising them; Mark 1:27, 32–34; 5:1–13;Luke 11:20), Satan (by plundering his house;Mark 3:27;Luke 11:21–22), disease (by healing the sick; Mark 1:29–31, 40–45; 2:10–12; 7:32–37), and the Sabbath (by being Lord over it;Mark 2:23–28). His divinity is also witnessed in his ability to predict the future (his sufferings, resurrection, and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know the thoughts in people’s minds (Mark 10:21; 12:24), and forgive sins, something which only God can do (Mark 2:10;Luke 5: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