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었거든 홀로 오래 멀리 걸어 보시라 !
요즘에 나에게 던지는 가장 큰 질문 2가지가 있다면
‘사람은 왜 질문하는가?’와
‘사람은 왜 걷는가?’ 이다.
그런데 이 2가지 질문을 합치면 무엇이 될까?
‘바로 [생각하며 걷기, 걸으면서 생각하기]가 될 것이다.
걷기(walking)에 철학(哲學)적인 요소가 강하게 있다는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사람은 길 위에서 자란다] 라고 하였다. 사람이 길 위에서 자란다는 것은 ‘길에서 걸으면서 자란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좋다. 사람은 걸으면서 성장하고, 걸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에게는 걷기는 ‘귀찮은 일’로 점점더 전락하고 있다. 교통수단의 발달이 도리어 ‘걷기의 퇴보’를 이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두 다리로 걷지 않고 마음의 다리로 걷는다’라고 변명을 늘어 놓을 수도 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걷는 것은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주말이면 산행을 하고, 심지어 휴가기간에 멀리 순례를 가는 이들도 많다. 이러한 걷기 행위는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갈 것이다. 최근에는 관광상품으로 ‘순례상품’이 인기이다. ‘산티아고길 순례’가 대표적이다.
위의 2가지 질문을 위하여 나는 서재에서 몇해전에 감명깊게 읽었던 책을 다시 먼지를 털고 끄집어내었다.
하나는, 다비드 르 브로통의 [걷기 예찬]이고 다른 하나는,
프레데리크 그로의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이다.
둘다 프랑스의 철학자들이다. 프랑스는 ‘철학의 본고장’이다.
이곳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가 기억이 난다. 대형버스가 고장이 났을 때 한국 사람들은 주로 ‘불평’을 하고, 그 나라의 느려터진 ‘시스템’을 비난하였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가방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여행중 읽을 ‘책’을 끄내서 읽는 모습을 보았다. 한편에서는 불평을, 다른 한편에서는 감사는 아니지만 잠시 ‘독서여행’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가 대단히 높은 수준의 ‘문화국가’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문화가 저속하고 수준이 낮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은 수준의 ‘문자의 나라’이며, ‘문해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이다. 다만 점점더 그런 ‘감성’과 ‘여유’가 사라진다는 것이 안타까워진다.
두 권의 책을 끄내서 다시 읽는데 마치 그 책속을 걷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침에 구독하는 신문에는 [내가 만난 명(名)문장]이라는 코너도 있고, [책속에서 만난 명문(名文)들]이라는 코너도 있다. 그런 코너가 그냥 실리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독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엄선되고 선별되어 실리는 것이다. 나도 자주 여러 편의 서평과 칼럼을 올린다. 그럴려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한다. 책에게 의존하지 않고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 ‘독서광’보다는 수집하는 ‘수집광’에 더 가깝다. 일본말로는 ‘츤도구 - 적독파- 쌓을 적, 책 독, 무리 파 ’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2권의 책에서 명문장(名文章)을 다시 만나면 기록해 놓으려고 펜을 준비하고 공책을 펼쳤다.
다비드 르 브로통의 [걷기 예찬]에서 만난 명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이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이 명문장을 보면 삶은 어쩌면 ‘산책’이기도 하고, 아니면 ‘장거리 여행’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많은 문인들과 철학자들, 사상가들과 종교가들은 오래전부터 ‘걷기예찬’을 했던 인물들이 많다. 짧은 거리를 산책하면서 철학하고, 시를 쓰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을 것이다. 먼 거리를 여행 또는 순례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도 가졌을 것이다. 물론 쉼과 안식을 얻으며, 건강과 힐링을 추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걷는 다는 것은 ‘지속적인 성격’을 갖는다. 즉 정지하거나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걷는 다는 것은 다른 교통수단에 비해서 함참이나 느리고 원시적인 방법이다. 인간은 두 다리가 있기 때문에 계속 걷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다른 교통수단은 걷기가 없다. 그저 타는 것이며, 발보다 손을 더 움직이는 일이다. 그것은 오로지 속도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풍경은 지나가는 부속물에 불과해진다.
걸으면서 우리는 주위의 환경과 풍경을 같이 대하게 된다. ‘느린 삶’의 기본은 바로 ‘걷기’에 있다.
물론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걷기를 그리 예찬하지 않으나, 몇 해를 걸은 젊은 날의 경험이 나의 ‘정서’를 만들어 주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차비가 없어서 한 달 이상을 학교와 집을 걸었던 적이 있다. 하루에 왕복 22킬로 미터를 걷는 것이었는데, 걸으면서 나는 너무나 쉽게 불평하고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하였는데 그 불평과 짜증이 그치고 주변에 푸르른 나무들과 식생들을 바라보면서 인사하고, 얼굴에 스치는 바람에게 고마워했고, 간간히 피어난 꽃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한 버겁고 힘든 삶 자체에 대한 생각들도 걸으면서 정리가 되어가고, 그리고 단순해져갔다. 더운 지역에서 먼 거리를 걸으려면 물이 1리터 이상이 필요하다.
목적지로 향하는 지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타고는 싶지만 걷기는 나에게 좋은 경험과 추억을 선사하였다. 느린 걷기야 말로 오랫동안 걸어가는 비결이 된다.
걷는 것은 속도를 요구하지 않는다. 삶의 속도와 영혼의 속도가 벌어질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현대인은 자기의 길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대인은 그런 시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리 만무하다. 나도 그러한 사람중에 하나였다.
걷기는 삶의 풍경을 선물한다. 걸을 때만이라도 자신의 몸으로 산다는 건 매력적이고 관능적인 경험이 된다. 그러면 서서히 걸으면서 행복이 차오르는 것도 느끼게 된다.
지난 주 여러 제자들과 같이 산행을 하였다. 제법 먼 거리인데 하나의 산에서 다른 산까지 이어진 산행로를 따라서 걷는 것이었다. 걸으면서 산에 피어난 꽃들도 보고, 작은 동물들을 보기도 하고, 비온 뒤에 솟아난 버섯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그리고 소나무나 전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를 들이 마쉬며 숨다운 숨을 쉬는 것도 좋았다. 갈증 뒤에 물을 마시는 것은 청량 음료 이상의 수분만족을 준다.
걷는 다는 것은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경험과 비슷하다. 단순히 몸의 외출이기도 하지만 생각과 느낌의 외출이기도 하다. 늘 정해진 루트나 좌표가 아니라 정해지지 않는 길이나 루트를 다녀보는 것은 ‘스페셜’함을 선사한다.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어보면,
걷기에 대한 강조가 몇 줄 나온다. 한달에 한번은 자신을 위한 ‘특별한 시간’을 만들어라 라고 부탁한다. 바로 여행을 가보라고 한다. 같이 가도 좋고, 혼자 가도 좋지만 반드시 ‘생각거리’를 가지고 가야 한다고 부탁한다. 걷기가 좋은 것은 바로 ‘생각거리’를 가지고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잃어버린 자신과 자아를 조금이라고 찾는 귀한 시간이 된다.
그런 시간과 추억을 만든 사람은 다음에는 서서히 그것에 ‘중독’이 되어간다.그래서 짧은 거리가 점점더 길어진다. 여행은 바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알고 쉽게 인지하는 루트를 따라 가다가 나중에는 어떠한 좌표도 정하지 않은 채 삶의 걷기를 누려볼 수 있을 것이다.
‘좌표가 없이 걷기’는 마치 사막이나 광야를 걷는 느낌일 것이다. 거기에는 길이 없다. 하지만 모든 곳이 다 길이다. 그러한 길에서 우리는 ‘새로움’을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와지는 자신’도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뽑은 두 번째 책의 명문장은 이것들이다.
“실패하는 사람은 방황하고, 성공하는 사람은 여행한다”
- <잃어버린 시간들, 미리엘 프루스트>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야외에서, 특히 길 자체가 사색을 열어주는 고독한 산이나 바닷가에서 생각하고, 걷고, 뛰어오르고, 산을 오르고, 춤추는 것이 우리의 습관이다.”
- <즐거운 학문 , 니체>
사람들은 살다보면 한 두번쯤은 자신의 길을 잃어버린다. 실패해본 사람은 바로 자신의 길을 잠시 잃어버린 사람이다. 실패가 일어나더라도 곧 일어나 걷는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회복하는 사람이다. 내 선배중에 하나는 목회자인데, 처음 목회실패를 처절하게 겪고 나서 '먼 산 기행'을 시작했다고 한다. 새벽에 기도하고 산 정상까지 오르내리면서 기도하며 걷고, 명상하면서 걷고, 성경암송을 하면서 걸었다고 한다. 나중에 목회를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 사람은 방황한 것이 아니라 여행한 것이다.
사람이 잃어 버린 귀중한 물건이 있다면 그것을 찾아서 여기 저기 헤매며 다닌다. 물론 그 물건을 찾았을 때는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돌아온다. 잃어버린 물건에 대해서도 그런데 길을 잃어버린 자신, 방황하는 자신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찾아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인 경우가 많다.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서 약물이나 식품에 의존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서 신과 종교에 의존하기도 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데 가장 좋은 약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것에 근접한 것이 바로 ‘시간투자’에 있다.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면 잃어버린 것이나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데서는 멀어진다.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걸어보는 것이 바로 잃어버린 자신과 마음을 찾는 첩경이다.
나는 책속에서 길이 있다고만 보고 책을 열심히 탐독하였지만 책속에는 그리 길이 없다. 하지만 길을 얻을 지혜와 방향을 제시하낟. 책 속에는 ‘길 같아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니체가 바로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철학자들이 인정하는 철학자는 이상하게도 ‘니체’가 독보적인 존재이다.
[짜루투스투르는 이렇게 말했다] 라는 책을 보면 그저 놀라고 감탄에 젖는다. 이것은 사람이 썼다고 보기에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니체는 수많은 날을 걸으면서 생각하고, 사색하고, 발견했다고 한다.
“책, 인간, 음악의 가치와 관련된 우리의 첫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는 걸을 수 있는가....”
니체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구상하는 사람이 위의 책과 인간, 그리고 음악에 얽매인 사람보다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쓴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이라는 것이 대부분 ‘도서관에서 나온 책들’을 베끼고 피상적으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 독창성은 도서관에서 나오지 않는다. 독창성은 도서관 밖에 있다. 자연에 있다. 걸으면서 사유하기, 사유하면서 걷기에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걸으면서 가벼워지고 경쾌해진 것이다.
그는 ‘걸어주는 발’에 대한 찬사를 한 것이다.
간혹 “나는 니체를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말이 그리 좋지 않다. 니체를 좋아한다는 것은 니체처럼 살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도 사랑하고 참고 인내하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펼쳐 나갈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우리 인생을 [이 땅에 영적인 여행을 온 여행자]로 묘사하였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여행을 온 것이고,죽으면서 여행을 가는 존재이다. 그 사이에는 걷기가 있는 것이다.
길을 잃었거든 홀로 멀리 오래 걸어 보아야 한다.
철학자들이, 여행가들이 왜 그토록 산책과 걷기를 강조하고 즐겼는지 몸소 깨달아 알아야 한다. 걷는 다는 것은 그저 육체적인 행위이면서 생각하는 일이다. 나는 나를 과연 얼마나 생각하고 살았나? 그것도 온몸으로 생각해 본 적은 있는가?
그러니 같이 도보여행을 가기보다 홀로 도보여행을 하면서 오랫동안 걸어보는 것이 어떤가? 물론 나도 걸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살이 조금 붙었는데 다이어트도 하고, 또한 무보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아서 걸을 것이다.
코엘료가 자신의 책[연금술사]에서 ‘자아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을 갔듯이 걸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길을 찾을 것이고, 그 여행의 끝에 길이 보일 것이다.
이 글을 더 충실하게 읽으려면
영국의 가디언지(The Guardian)에 나온 프레드릭 그로 특집을 권한다.
(그의 기사를 언제 번역해서 올릴 예정)
[Frederic Gros : Why going for a walk is the best way to free your mind, 2014년 4월 20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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