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저명한 경영학자가 생존의 4가지 부등식을 말하였다.
그가 밝힌 생존의 부등식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살아가면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식에 가까운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두개의 존(ZONE)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자존이다.
자존심이라고 불러도 좋고, 자존감이라고 불러도 좋다.
자존은 - 자기존재를 줄인 것이다.
자기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기가 중심이여야 한다는 [자기중심성]에 가깝다.
이는 [이기심]과도 관련이 깊다.
한때는 도덕적인 관점이 강한 탓인지 [이타심]이나 [타자를 향한 배려와 존중]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살았으나,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인간의 이기성이나 자아발견에 더 역점을 두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현저하게 유지되고
지속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도 남의 말을 자주 듣고 살아간 것이다.
남을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그런 '양식'이 어느새 '타성'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두번째는 생존이다.
생존은 살아가는 기술이기도 하고, 먹고 살며, 호흡하고, 생명의 지속을 갖는 것이다.
물론 생존은 죽음의 지극한 반대말이다. 죽음은 끝이라는 전제를 달지만 생존은 여전히 살아있음에 대한
깊은 욕구와 관련이 깊다. 사람의 욕구중에 생존의 욕구가 있다.
그런데 반대로 '사망의 욕구'라는 것이 있는가?
사망에 욕구라는 것도 알고보면 생존의 욕구이다.
우리는 생존해야 하는 이유를 본질적으로 알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것이 바로 생존이다.
이 생존은 인간의 안전과 안정과 관련이 깊다.
생존하지 않으면 생활할 수 없다.
생존하지 않으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유대인들의 이야기 중에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라 Be live, Be absolutely live" 이 말은 단순하면서도 명령어로 다가온다.
반드시 명심할 것은 삶은 명령이다.
아마도 홀로코스트를 겪으면서 생겨난 말인 듯 싶다.
하지만 연원을 찾아가보니 몇 천년도 넘은 유대인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다.
생존에 대한 염원은 가장 중요한 1차적 욕구인 것이다.
유대인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1단계의 생리적 욕구를 평생의 욕구라고 말했다.
물론 심미적인 7단계의 욕구도 평생의 욕구라고 말했다.
생존의 부등식에는 4가지가 나타난다.
1. 나 죽고 너 살자 모델
이 말은 전형적인 의인의 모델이다. 성자의 모델이기도 하다. 예수와 석가, 그리고 소크라테스 들이 이런 분들이다.
우리는 이 분들처럼 살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멋?있어 보이지만 정녕 우리 대중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생존 부등식은 아니다. 우리의 상식과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의 영역에서 숭고한 삶을 산 사람들에 대한 찬미는 이어지지만 생활속에서 우리의 생존 부등식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다.
2. 나 죽고 너 죽자 모델
이 모델은 너무나 극단적인 생존 부등식이다. 이것은 전쟁의 경우가 그렇다.
최근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양상이 그렇다. 둘다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둘다 지는 싸움이다.
물론 러시아는 불곰의 자존심으로 끝까지 전쟁을 수행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서로 죽이는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말해서 사탄의 혁혁한 전과만 올려주는 것이다. 이 모델은 최악의 모델이다. 생존부등식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모델이다. 그러나 현실판 모델이기도 하다. 이런 일이 전 세계에서 여전히 자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테러가 그렇다. 이슬람 지역에서 어머어마한 테러사건들이 하루에도 일어나고 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테러들이 일어난다. 자살폭탄테러의 경우는 나 죽고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고, 큰 상처를 입힌다. 이 모델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는 행위이다. 자신들의 그 더러운? 명분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이들과 같이 공멸하려는 것은 이 세상을 더욱 더럽히는 일이 된다. 탈무드는 말한다. "피는 피를 부르고, 화는 화를 부른다" 우리는 이런 생존 부등식을 저주해야 한다.
3. 나 살고 너 죽자 모델
이 모델은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형태의 생존 부등식일 수 있다. 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경쟁구조가 그렇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보면 애벌레가 어느 산을 올라가는데 알고보니 그 산은 애벌레들의 산이었다. 그 애벌레는 올라가보니 다시 내려와야 한다는 등산의 원리를 체험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런 자아의 발견의 순간에 애벌레는 나비가 되어 훨훨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오르게 된다.
그런데 '나 살고 너 죽자'의 모델이 자주 나타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한다. 나 자신도 교통사고가 났을 때 내 차를 박은 상대방 차가 더 파손된 것을 보고 그냥 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너무나 감사하고 감사한 말을 내게 남겼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남의 차에게 파손을 살짝 일으켰는데도 그 상대방은 자신이 뜯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뜯어낼 심산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에게는 '나 살고 너 죽자'라는 것이 콱 박힌 것이다. 스스로 사람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상실하는 순간을 보게 되었다. 타인에 대한 배려, 참 좋은 말이다. 하지만 타인에 대하여 열정보다 '냉정'을 더 가져야 한다. 반드시 도덕과 더불어 법이 같이 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의 인간관계가 한결 편해지는 것이다. '나 살고 너 죽자' 모델은 젊어서는 꽤 괜찮은 모델 같지만,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버려야 하는 모델이다. 이유는 허무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젊어서는 모르는데 늙어서 깨닫는다. 젊어서 깨닫고 늙어서 지혜로워지는 것이 낫다. 참 바보같은 인생이다.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으나 그저 비교하는 주책덩어리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 사람들이다. 그래서 살면서 가장 많이 배워야 할 것은 어거스틴 성자의 말대로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인 것이다.
3. 나 살고 너도 살자 모델
이 모델은 가장 바람직한 모델이다. 게임이론에 보면 서로 이기는 싸움이며, 도교에서 말하는 '상생'의 원리이다.
서로 이기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양보와 배려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신이다. 우리가 교육하고 교육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은 상생의 원리를 심어나가는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자신을 낮추어야만 '나 살고 너도 사는 모델'이 만들어진다. 이 모델을 갖춘 사람들이 많아져야 진정한 선진국이고, 이상국가에 가깝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없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런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다짐과 인생의 각오를 [나도 살고 너도 사는 ] 자연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자연의 원리를 보면 '주고 받는 관계'를 볼 수 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말 없이 주는 것으로 여기는데 그렇지 않다. 인간보다 자연의 희생이 더 큰 것은 사실이다. 나 살고 너도 살려면 서로가 서로에게 희생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친구를 사귀어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친구를 얻을 때는 손해 보지 않으면 얻기 힘들다. 이익을 보려고 하고, 다른 친구보다 앞서가려고 하면 친구를 얻는 것은 거의 어렵다.
사람들을 바라볼 때 이 4가지 모델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 자신은 어느 모델에 가까운지도 살펴볼 수 있다.
경영학을 오랫동안 수학하고 연구한 바로는 사람은 결국 '자기경영' '인생경영'에서 가장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실패한 사람이 남에게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모델'을 인생경영의 모토로 삼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필경 더 고상해지고 우아해질 수 있다. 자존과 생존은 반드시 없어서는 안되는 부분이다. 자신의 자존과 생존을 다 지키고 발전시키려면 상생의 원리를 삶의 중심원리로 삼아야 할 일이다.
갈수록 세상은 혼돈과 혼란, 그리고 불확실성이 높이진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혼돈할 경우에 질서를 찾고, 혼란할 경우에 안돈을 찾고, 불확실성이 놓다고 하여도 인정하면서 자신이 확실하게 잘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자신의 삶으 가꾸어 가야 한다. 우리는 정원의 정원사처럼 살아야 마땅하다. 생각은 현자같이 하되, 삶의 방식은 농부나 정원사처럼 부지런해야 한다. 땀흘려 일하고, 그리고 자신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것이 정의로운 삶이다.(플라톤)
결국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에서 '나 살고 너 살자' 모델의 결정판이 만들어진다.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교만하고 자행자지하게 되면 곧 정의를 외면하게 되고, 나만 살고 남을 죽이는 결과를 계속해서 만들어 낼 것이다.
앞서 이기심도 중요하다고 하였는데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을 품에 안을 수 없을 만큼 우리의 팔은 짧지 않다. 심지어 팔을 펼치면 더 많은 사람을 담을 수 있다. 우리의 가슴 속의 팔을 펼치면 수천, 수만의 사람도 답을 수 있다. 결국 그릇이다. 우리 내면의 그릇, 정서의 그릇, 사람됨의 그릇이다. 그것도 정의의 그릇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랑의 그릇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쓰레기더미에서 장미를 피워내고, 라일락을 피워낼 것이다. 황야에서 수선화를 키워낼 것이다. 생존 부등식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에 먼저 스스로에게 유익함을 얻는다. 감사한 일이다.
가을 하늘에 날으는 기러기 떼를 본다.
그 기러기 떼는 하늘의 비행기가 지나가더라고 결코 대열은 흐트리지 않는다.
자존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동방식을 보면 '생존의 강한 바램'이 담겨 있다.
자존과 생존,이 2가지 존을 우리는 끝까지 지켜내며, 다른 이들도 존중하는 우아함과 품격을 더욱 갖추어야 할 일이다.
나이가들수록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소중하다. 물적 재산만 추구하지 말고 지적 재산과 인적 재산도 추구하되, 인적 재산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 놓아라. 그래야 우리 자신도 품격이 높아진다. 인간의 품격이 높아진다. 요즘 뉴스들을 시청하면서 형편없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보니 눈이 더러워 진 것 같다. 그래서 눈을 감고 나를 성찰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나 살고 너도 사는 모델을 삶의 방정식으로 삼고 이를 나의 삶의 철학까지 만들어 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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