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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강연 이야기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1938년 출판, 아직도 현대적인 인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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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게 길을 묻다. 50차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1938년 출판, 아직도 현대적인 인문서>

 




“문명은 놀이 안에서 놀이로써 생겨나 놀이를 떠나는 법이 전혀 없다.
인간은 놀이할 때만 완벽한 인간이다.” - 호모 루덴스 중(中)


얼마전 추석시즌에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코로나 블루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여행 및 숙박 예약’이 매진 될 정도로 했다고 한다. 추석시즌에 바캉스를 보낸다고 하여,‘추캉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는 여기서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nature)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바로 [호모 루덴스]이다. 호모 루덴스라는 책은 그의 인생 말기에 작성된 것으로서 이전에는 [중세의 가을]이라는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루덴스는 라틴어로 [놀이]라는 뜻이다.

요한 호이징가는 네덜란드(화란)이 낳은 세계적인 학자이다.
그는 유희적 인간을 뜻하는 용어를 직접 만들어냈다.
인간의 본질을 유희라는 점에서 파악하는 인간관을 펼친 것이다. 그는 르네상스와 중세의 문화사를 연구한 사람이다.

호이징가의 책은 너무나 두꺼운데, 그의 책을 읽으려면 지극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는 유희라는 것이 단순히 논다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창조 활동을 가르킨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에서 다양한 창조 활동을 전개하는 학문, 예술 등 인간의 전체적인 발전에 기여한다고 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과연 ‘노는 것’을 좋아한다.

호모 루덴스는 바로 [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레저 시대의 인간상이다. 사생활 존중주의가 강해지는 현대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레저를 추구하고, 노는 것 그 자체를 추구하는 향락인 또는 여가중심형의 인간을 말한다.



최근에 젊은 세대에 두드러지는 경향은 아무리 노력해도 집을 살 수 없고, 그리고 자신이 받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결혼도 할 수 없다는 실망감과 미래에 대한 좌절감을 예약하여 미리부터 [카르페 디엠]을 하겠다는 의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쾌락주의 또는 향락주의적 가치관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는 것도 된다.

요즘은 무엇인가 소유경제에서 공유경제로 세상이 바뀌고 있다. 무엇인가 지식이나 정보도 소유하는 것에서 이제는 구독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여행도 공유경제의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가치관에 입각하여 인생의 의의를 현세적인 소비, 레저, 놀이, 향락에서 찾으며, 그것을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 해 추구하는 인간을 일찍이 호이징가(1872~1945)는 호모 루덴스라고 부른 것이다.


원래 인간은 지혜와 이성과 지식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 Homo Sapiens)이면서 생산과 노동에 정통하여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였다. 그런데 생산 또는 노동의 마당에서 소외된 인간성을 소비나 여가(餘暇)가운데서 찾으려고 하여 근검하고 절약하는 노동윤리를 부정하고,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시간을 적극적으로 쾌적하게 소비하려는 여가(餘暇)의 윤리(倫理)가 갈수록 우세해지고 있다.

그래서 유럽은 일찍이 노동시간을 52시간 안으로 줄여서
Work Less, Leasure More 를 강조하고 있다. 호주나 뉴질랜드를 가보아도 노동의 강도는 무척 약하며, 인간의 수고와 노동을 기계와 컴퓨터가 상당부분 대신한다.
놀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곤 Agon] 이라고 한다.
이는 거의 전적으로는 축제의 영역에 속하는데, 축제는 곧 놀이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고대문화에서는 놀이가 상당히 전투적었고, 이 전투가 본질적으로 놀이와 같다고 보았다.

심지어 학교라는 단어를 살펴보자. SCHOOL은 원래 [여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플라톤의 [법률 - 파이돈]을 보면 [인간은 신들의 놀이를 놀아 주는 노리개]라고 보았다. 인간이 원칙과 감각의 중간에서 놀이를 하면서 감각을 억제하고 원칙을 고양하면서 신의 질서를 확립해 나간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놀이가 없다면 인간은 상당수 향락에 젖어서 타락의 길을 되풀이 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하였다.

플라톤은 인간의 놀이 자체가 목적이며 놀이의 정신은 행복한 영감의 원천이 된다. 놀이가 인류 문명을 이끈 원동력이며 모든 문화의 기원에서 놀이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말에 일정 공감하며, 놀이는 여유와 더불어서 창조활동과 예술활동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요즘에는 초고령 사회에 진입하여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100세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유희적 존재]로서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준비도 하지만, 현재에 대한 지극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것일까?

포커스를 좁혀서 한국사회를 살펴보자.
현재 한국은 경제규모로 말하면 세계 10위권의 국가이다.
수출은 이미 세계 7위를 달리고 있다. 앞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세계 5,6권의 경제를 형성할지도 모른다는 관망이 나온다. 교육강국이면서 지식강국의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소득은 3만 3천불 정도이며, 대학진학율은 무려 70%가 넘는 나라이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고독사나 노인자살율은 세계 제 1의 국가이다. 그리고 항생제 소비량도 제일 높으며, 자살율과 더불어 이혼율도 각각 세계 제 1의 나라이며 아시아 1위의 나라이다.

농담삼아, 한국은 1위를 하는 것이 정말로 많은 신비한 나라이다.아마도 [최고병]이 걸려 있는 나라로 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 이외에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나라이기도 하다.

“돈이 많으면 살기 좋은 나라다” 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하지만 정말 돈이 많으면 살기 좋은 나라일까? 그렇지 않다. 돈이 얼마나 많아야 살기 좋다고 하는지에 대한 척도나 기준도 애매하다.

요즘 유행어가, 비혼, 워라벨, 스라벨, 소확행, 휘게 등 여러 신조어들을 보면 우리가 삶의 행복과 삶의 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호이징가의[호모 루덴스]를 보면서 한국 사람들이
[생존의 욕구나 동기가 무척이나 강한데, 생활의 욕구나 동기는 상대적으로 낮다]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놀이와 창의성에 대한 개념이나 기준이 낮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천재 작가 마크 트웨인은 “해야 되는 걸 하는 것이 일이요, 안 해도 되는 걸 하는 게 놀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호모 루덴스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하면 되는 것일까?
스포츠 활동을 하고, 시를 쓰고, 낭독하며, 음악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는 것이 과연 호모 루덴스의 라이프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릴 것이다. 호이징가가 생각하는 [호모 루덴스]의 개념은 이것보다 더 상위적인 개념이다.

바로 [행복 또는 웰빙]에 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도 필요하고, 그러면서 남이 정해주는 행복이나 즐거움이 아닌 내가 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해야 [호모 루덴스]의 삶의 길이 열린다고 보았다.

남이 정해주는 행복이 아닌 내가 정의하는 나만의 행복철학을 갖추라는 것은 나만의 [놀이정신과 창의성]을 갖추라는 것이다.

호이징가는 책의 마무리에서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말한다.

“진정한 문명은 어떤 놀이요소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문명은 자제와 극기를 전제로 하며, 또한 그 자신의 경험을 궁극적 최고 목표와 혼동하지 않는 능력, 그리고 자신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어떤 일정한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능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문명은 어떤 의미에서는항상 어떤 규칙에 따라 행해지는 놀이일 것이며, 진정한 문명은 항상 페어플레이를 요구할 것이다”

그에게 놀이의 타락은 문명의 타락이었다. 놀이는 고상한 것이어야 하며, 가치있는 것이어야 하며,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서재에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이라는 명저가 있다. 이 저서에 “놀이는 간단히 말해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사람의 상상력을 해방시켜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놀이는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인 범주에 해당한다. 놀이가 없으면 무명도 존립할 수 없다” 면서 호이징가의 아이디어와 명제를 이어 받았다.

호이징가는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노력을 정지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하였고, 리프킨은 “놀이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즐거움과 삶의 본능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어에 [디아고게]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여가, 휴식, 빈둥거림으로 해석된다. 이는 문명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어휘이다. 이는 동양한자인 한(閑, 한가로움)이나 느긋함과 관련이 깊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한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이는 생계와 생존을 노동의 목적으로 삼는 인식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동하는 목적은 곧 삶의 목적이 된다.

우리가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인 삶과 놀이와 한가로움을 누리며 사는 삶 중에서 어느 쪽이 바람직한 삶인지는 자명하게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데 방해되는 세력은 무엇이며 누구일까?

바로 호이징가는 [극우세력]이라고 보았고, 리프킨은 [글로벌 경제를 옹호하는 세력]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를 [시장원리]라고 부른다.

시장원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우리가 시장원리라는 것은 일요일이 지나면 월요일은 반드시 일을 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죽었으면 3일장을 치루고 반드시 그 다음 날에는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 시장원리이다. 이 시장원리가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 사람들은 저항하기 시작한다.

호이징가가 말한 호모 루덴스는 [지적이고 심미적인 몰두]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면서 이를 [성숙한 놀이]로 보았다.

성숙한 놀이라는 것은 “정치적 성격을 띠었건 상업적 성격을 띠었건 제도화된 권력의 무분별한 횡포에 저항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놀이하는 인간은 삶의 목적을 잃지 않고 이를 방해하는 세력과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이다.

호이징가나 리프킨에게 유희적 인간은, 막연하게 무위도식하는 인간이 아니라 저항하는 인간이 곧 호모 루덴스다.

얼마전에 이 글을 쓰고서,
컴퓨터 게임이나 휴대폰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들을 보았다.
한때는 나도 “너는 저렇게 오락만 해서 도대체 뭐가 되려고 하니” 하던 소리를 그치기로 하였다. 혹시 아는가 스스로 각성한다면 그 아이들은 프로게이머가 되든가, 해커가 되든가, 굴지의 게임회사의 CEO가 되든가, 아니면 IT 전문가가 되어 있거나 AI 전문가가 될지 아는가...

여기서 전제조건은 [각성 AWAKENING]이다.
그냥 게임페인이 되다가는 그냥 폐인이 된다.

게임하는 청소년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도 걱정이 되지만
마음이 조금 더 너그러워졌다.


그런데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호이징가나 리프킨이 말한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이 그리 쉬운게 아니라는 것도 발견한다.


한때 기획사에서 카피라이터로 근무한 실력을 발휘해본다.


[잘 노는 것이 이제는 경쟁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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