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6월 19일 화요일 #명작에게길을묻다
[거장들의 명작에게 길을 묻다. 7번째 세션]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I and Thou, 독. Ich und Du]
오늘은 매우 어려울 수도 있고, 매우 쉬울 수도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너무나 대단한 명작이어서, 죽기전에 반드시 필독해야 할 10대 서적이다.
바로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 I and Thou, 독. Ich und Du] 이다. 이 책은 내가 여러번 강의를 하였던 책이기도 하다. 인문학 포럼에서도 강의하고, 평생교육원에서도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마르틴 부버는 유태 사회철학자이다. 그리고 자연주의 신학자이다. 지금도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 사회과학대학을 가보면, 마르틴 부버 센터를 볼 수 있다. 나는 그의 제자에게 유태사회철학을 1학기 공부한 적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 이 글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한때 한국에는 인문학 열풍이 불어왔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인문학 열풍을 주도하였다. 4,50대 층들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같이 경험하는 세대이며, IMF를 겪은 세대이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애를 쓴 세대들이다. 지금도 애를 쓰고 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세대들은 자신을 성찰할 여유도 남을 돌아볼 여유도 별로 없었다. 아날로그적인 느린 삶에 대한 그리움이 강한 지성인 그룹들을 중심으로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문학 열풍은 껍데기만 남긴 것 같다. 어찌보면 허상만 쫓는, 그저 눈에 보이기에 좋은 교양인 것이다. 인문학이 주는 위안과 힐링과 효과에 대해서는 미지수인 것이다. 인문학 하면 일단 고전이다.
어떤 철학자는 "고전이란 쉽게 읽지도 않고,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언젠가 고전과 마주할 때가 온다" 라고 말했다. 서양고전과 동양고전들을 망라하여, 서울대학교나 연세대학교에서는 100선을 뽑아서 읽기운동을 주도했지만, 읽는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읽는 사람들은 주로 힘들었던 대학시절 문사철을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필자 역시 그러한 사람이다.
나도 어려서부터 고전을 익혀왔다. 창고같이 넓은 집에 동서양의 고전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종이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대학시절 고전을 다시 공부하고 싶어서 제일 먼저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다 잡은 책이 바로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이다.
그때가 90년도 였는데, 골방에서 얇은 그의 책을 읽어나갔다. 철학자의 책이기에 하나 하나 곱씹으면서 읽어나가는데, 책이 전혀 읽혀지지 않았다. 나는 그 책을 그저 '지식'으로 읽으려고 했다. '마음'으로 읽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배우고, 나름 책을 많이 읽어나간 청년이었지만, 전혀 그 책의 내용을 소화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최양부 교수라는 기독교철학 전공하신 교수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분은 "너는 그 책을 읽으면서 반드시 남의 말을 경청하고, 수용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 때의 나는 "나의 말이 앞서고, 나의 행동이 앞서고, 남을 배척하는 것에 앞선 학생이었다" 그래서 좋은 인문인이 되지를 못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 다시 읽었는데, 그 때는 부분적으로 이해하는 수준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군을 마치고, 대학원을 마쳤을 때 다시 읽어보니 또 달랐다. 이제는 서서히 '대화가 되는 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상처를 주던 사람에서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상처를 받던 사람에서 상처를 안받는 사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상처는 안받으면 되는 것이다.
[나와 너]란 책을 통해서, 부버의 생각을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파악하게 되었다. 30이란 이립의 나이가 들자, 인격 대 인격으로서의 만남을 중시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유명한 사상가는 [이 책은 위대한 고전이며 지성인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인문학의 웅장한 관문]이라고 부른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J.H. 울담 교수는
"나는 20세기에 발간된 책 중에서 이 책만큼 우리들의 시대생활에 심원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지를 가진 것이 또 있었던가 하고 스스로 묻곤 한다"
라며 부버의 저작을 극찬했다.
필자는 이스라엘 히브리대학교에서 교육학, 유대학, 성서학을 공부하면서 틈틈히 마르틴 부버의 철학과 신학도 곁눈질로 익혔다. 현대신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칼 바르트인데, 그 사람과 동문수학한 인물이 마르틴 부버이다. 칼 바르트는 [은혜의 신학]이라고 하며, 장로교 신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신학자이다. 반면에 마르틴 부버는 [자연주의 신학]이라고 하며, 구약신학이나 유태신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대화의 철학자'라고 불리운다.
그의 글을 나의 머리와 손을 통해서 밝혀본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이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최대한 쉽게 접근을 할 것이다. 그래도 어렵지만...
만남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참된 만남을 통해서 대화 유토피아의 건설을 할 수 있다.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나온 말로서, [낙원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반대는 [디스토피아 낙원상실 조지 오웰의 1984에도 등장]이다.
부버는 이 만남의 가치는 "사람이 너를 통하여 하나의 나가 되는데 있다" 라고 하였다. 결국 이 말은 "나의 나됨을 너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대화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발견하고, 남의 인격을 존중하며, 진리를 얻기도 한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다.
애플사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오늘 저녁 소크라테스와 식사를 한다면 나의 전 재산을 드려도 아깝지 않다"라고 했다. 위대한 인물과의 만남에 나의 재산과 인생이 죽을 정도로 아깝지 않다고 하니, 대화의 놀라운 위력을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관객없는 연극은 가능하나, (너)상대없는 대화는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
대화에는 여러가지 측면이 있다.
나와 너가 있다. 이는 존재의 전체를 가르키며, 관계라고 부른다.
나와 그것이 있다. 이는 존재의 부분이며 대상의 경험과 이용이라고 부른다. 각급 제도와 기술들이 그것이며, 그것들이다.
나머지 하나는 독백(Monologue)이 있다. 이는 대화를 가장한 것이며, 영혼이 없는 대화라고 부른다.
부버는 나의 상대인 너가 누구인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죽은 대화를 하지 말고 생명의 대화를 나누라고 말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대화하는 존재이다. 즉 상호작용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요즘의 사회공동체를 보라. 개방성은 높지만 친밀성이 무척 낮다. 내가 다니는 교회만 해도 그렇다. 사람들이 나를 제대로 알아보는데 무려 10년이나 지나야 했다. 자신이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고, 자기 소개도 제대로 하지 않는데, 대화까지 이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부버는 우리 사회를 공동체라고 하지 않고, [공이체]라고 불렀다. 가족적인 친밀감이 낮은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지극히 개인주의적이며, 나홀로 족들이 많아지고, 대화가 실종한 사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마르틴 부버는 대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없이 이루어지는 대화는 기술적인 대화이거나, 서로를 용납하고 포용하는 대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사랑의 완성자되신 예수의 사랑을 그의 책에서 말한다. "예수는 위대한 유대인 형제이십니다."
만남은 나와 너의 만남이다. 그런데 갈수록 나와 그것의 만남이 너무 많아진 다는 것을 부버는 한탄해하였다. 역사는 그것(확장된 대상)의 세계가 점점더 확대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라는 것은 위에서 경험과 이용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것의대표적인 것은 지식이나 전문성이다. 그리고 정보화와 진보이다. 또한 각종 제도와 직업을 말한다. 과학의 발달도 그것의 확장이라고 본다.
부버는 이와 같은 것들이 갈수록 너와 나의 살아있는 관계를 파괴했다고 보았다.
부버가 보기에는, 자본주의가 발달한 세계는 정신이 병들어 있는 시대라고 말한다. 즉 진보와 발전의 이름으로 향하는 그것의 세계가 너의 세계라는 생명의 흐름을 막거나 인간사회를 압박하고 질식시킨다고 보는 것이다. 조직체로서의 사회만이 있고, 인격공동체로서의 사회는 없다라고 보는 것이다.
인격이란 다른 인격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 만일 나라는 사람이 너라는 인격이나 사상을 대면하지 않으면, 언젠가 '너'의 공격을 각오해야 한다. 누구나 허무한 시절이 오게 되어 있다. 부버의 말을 빌리자면,
"언젠가 인생은 그것이라는 그림과 너라는 그림을 한꺼번에 중복적으로 만난다"
대화는 주고 받는 것이다. 사랑도 주고 받는 것이다. 사고 파는 거래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피상성에서 보면 사고 파는 거래의 관계로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나는 인간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염세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을 고슴도치에 비유하였다.
고슴도치는 가까이가면 찔린다. 그래서 심하게 상처를 입기도 하고, 심지어 그 독성에 죽기도 한다. 사람들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도리어 상처를 크게 받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법이다. 그런데 고슴도치는 멀리하면 추워진다. 더 멀리가면 더 추워지므로 다시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적인 철학적, 인간적 행동을 계속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유안진 문학가는 우리 인생에서 '지란지교'를 말하면서, "평생에 2-3명 같이 대화를 나눌 친구가 있다면 그는 성공한 인생"이라고 밝힌다.
인간은 결국 고독한 존재이다. 그러면서 만남을 향수한다.
독일의 위대한 시인 한스 카놋사는 그래서 " 인생은 만남이다"라고 정의한 것이다.
우리 인간은 대화하는 실존이다. 나와 너의 주체적 관계를 늘 갈망하는 존재이다. 사람과 물건 사이에는 만남이 없다. 부버의 생각을 빌리면,
우리는 나와 그것이라는 근원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발생하는 비인간과나 물건화(부속화) 현상에 대해서 대항해야 한다. 그런 현상을 만들고 동참하라고 하는 인간에 대해서도 저항해야 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자유는 없다.
참된 공동체는 나와 너의 근원어가 빛을 발하는 곳에서 출현한다. 부버는 개인주의나 집단주의도도 거부한다. 대신 작은 유기체적인 공동체를 더 선호한다. 그래야만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이다. 학생은 참으로 많으나 제자는 적다. 선생은 참으로 많으나 스승은 적다. 학부모는 참으로 많으나 좋은 부모는 너무나 적다.
나의 학원 겸 연구소에는 상담이나 대화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되도록 기술적인 대화를 피한다. 기술적인 대화는 의사나 환자, 선생이나 학생, 상담자와 피상담자간의 지식적 대화이다. 이런 대화는 결국 마음을 얻지 못한다. 상거래 수준일 뿐이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상거래는 피할 수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상거래 하듯이 사람들을 만난다면 좋은 친구는 얻을 수 없다. 부버는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을 대하듯이 하라고 한다. 사람에게 범죄하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한다
. 부버에게는 "20세기 사회가 기술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성장한 사회가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나침반없이 표류하는 사회"라고 단정짓는다. 그리고 그 사회가 위험사회라고 말한다.
에릭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부버의 사상을 가미시킨다. "소유하려고만 드는 사회는 위험사회"라고 말한다. " 돈이면 모든 것이 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행복이 있는게 아니라, 나의 나됨이라는 존재발견속에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소유는 그저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와 건강만 있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에릭프롬도 실상 마르틴 부버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게 인간의 존재양식은 바로 '나와 너'의 만남과 대화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결국 사사로운 이익추구나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나와 너의 관계를 배우고 그 진리성에 눈을 뜰 때 비로소 구원을 얻는 것이다.(마르틴 부버)
요즘 세대를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칼 포퍼는 '도망가는 세대'라고 했다. 부모와 자녀간에 서로 도망을 간다. 스승과 제자간에 서로 도망을 가며, 이웃과 이웃끼리도 도망을 간다. 자꾸만 나는 있는데, 너가 없는 위험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있는데 그것만 존재하는 불행한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다.
좁게 보면 개인과 개인이 서로 도망가는 시대이며, 넓게 보면 국가와 국가가 서로 도망가는 시대이다.
어찌보면 대화의 중요성을 알지만,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외로 대화는 쉬운 것이다. 열린 마음만 가지고 수용하고 포용하려는 최소한의 인격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귀는 항상 열려 있으니 들으면 된다. 입은 열고 닫을 수 있다. 결국 마음이다. 마음이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잘 관리하라. 그래서 대화의 주체자로 나아가라.
진정한 인문인은 인간을 사랑하는 휴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 위에 학문과 교양 그리고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 인성이 지성보다 앞서야 한다. 인성이 참된 실력이다. 인성의 기본은 바로 대화에 달려 있다. 대화를 하면 사람을 얻는다.
이 나와 너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은 정현종이다.
그의 시로 나의 글을 갈음한다.
방 문 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마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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