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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과 고전 이야기

명길묻42, 다산과 황상, 삶을 바꾼 만남 읽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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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에 만난 가장 멋진 책 - 만남은 맛남이다.
    다음 출처 이미지 - 정민 교수님의 책




스승 정약용과 제자
<삶을 바꾼 만남>을 읽다.

“어떤 만남은 운명이다”

얼마 전에 친한 형님의 박사학위식에
참석하여서 같이 식사를 하던중에
[다산연구가]이신 형님의 고등학교 선배가 되시는 분과도 조우를 하게 되었다.(2020년에 쓴 글)

그분은 다산박물관의 학예사로서도 일을 하셨고, 오랫동안 방송가에서 근무하신 분이셨다.

그분은 친히 [다산 TV]도 운영하시면서 다산 알리기에 애쓰시는 분이셨다.

그분에게 “다산(茶山)을 보면 다산(多産)이 느껴집니다.”라고 농담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산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되었다. 그분과의 만남도 무척 소중한 것은 바로 그분속에 담겨진 수많은 [다산에 관한 이야기 보물]을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 보따리를 언젠가는 풀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다산(茶山) 에 대해서는 정말 놀랍기만 하다. ‘동양 최고의 학자’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은 분이시다. 그분이 지닌 학문적인 스펙트럼과 레퍼런스는 정말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존 나이스비트가 말한 ‘아시아적 가치 Asian Value’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조선시대 전방위 지식인 - 내게는 정 다산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황송한 일이다.

단순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뛰어난 실학자요, 강진에 18년간 유배를 가서 목민심서를 저술한 분’ 정도로만 이해하였고, 그리고 역사기행을 할 때 잠시 강진초당에 들려서 다방면에 뛰어났지만 억울한 폐족으로서 살아간 인물 정도로만 인식하였다. 조금 더 안다면 다산의 호는 그가 유배받았던 강진의 [다산(茶山)]이라고 불리우는 곳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인문학 열풍이 불면서 다산(茶山)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강연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많은 저작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다산에 대한 진면목을 살펴볼 요량이 생겨났다. 나는 독서를 많이 하는 다독가이다. 그러면서 학위과정을 여러군데 다니면서 저명한 교수들과 저자들을 만날 기회들도 자주 갖는 행운을 얻었다.

  • 다음출처 이미지 - 어떤 만남은 운명이다.


결국 만남이다. 만남과 만남이 이어지면서 나는 나의 인생을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만남은 운명이다’ 라고 한다.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의 만남이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만남은 맛남이다”

마치 삼계탕 집에 가서 그 음식 맛을 보는 듯한 기분을 자아내는 표현이다. 맛난 만남이 얼마나 되겠는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가면 다산의 생가가 있고, 다산기념관과 다산문화관이 같이 있다. 하지만 전라남도 강진이야말로 다산이 [목민심서, 흠흠심서, 경세유표]를 지은 곳이며, 수많은 유교의 경전에 대한 [강해서나 강학집]을 지은 곳이다. 강진은 그래서 이름 없는 동네가 다산 덕분에 유명한 동네가 되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이탈리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전에 다빈치가와 다산가의 후손들이 만나서 교류하고 교제하는 다큐를 본적이 있다. 여기서 이들의 만남은 진정 맛남이 된다. 후손들이 서로 만나 교유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역사드라마다.

나는 이 책을 읽는데 무려 일주일정도 걸렸다.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고 밑줄을 치면서 읽는데, 다산보다는 황상에 집중해서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저자인 정민 교수의 놀라운 연구열과 해박함 그리고 전문성에 감탄하였다. 이 책을 쓰면서 아마도 이가 2-3개는 빠지고, 손톱이 2-3개는 빠져야 할 정도라고 상상하였다.

하지만 첫 문장이 가지는 힘이 있다.

“만남은 맛남이다.”

누구든 일생에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맛난 만남을 갖는다. 이 몇 번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런데 다산은 15세의 더벅머리 소년 황상을 만난다. 강진 고을의 아전으로 일하는 황인담의 장남으로서 다산의 어린 제자로 들어간다. 지체 높은 양반이요, 학자인 다산은 이 어린 제자를 수제자로 바꾸어 나간다.
황상은 다산(茶山)을 만나서,

“저같이 둔한 사람도 공부를 해도 될까요?” 하고 물을 때,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진다. 답답한데도 연마하면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난게 된다.”

그리하여 다산은 황상에게 평생을 공부할 용기를 주었다. 일개 아전의 아들이 다산을 만나서 조선을 대표하는 시인의 길이 열리게 된다. 다산은 황상에게 ‘삼(三)근(勤)계(戒)’를 써준다. 바로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여라’ 라는 단순하지만 평생에 간직할 말이었다. 황상은 스승의 이 말을 평생 간직하고 신명을 다하여 공부하고 시학을 펼치게 된다.

다산이 처음 황상을 만난 곳은 강진 읍내의 주막집이었다. 이 주막집의 주모와 딸은 다산에게 5년간 서당을 열수 있도록 집을 내어준 사람이다. 이곳은 지금 [사(四)의(宜)재(齋)]라고 불리우는 곳이다. 사의재라는 뜻은 [네 가지(사(思)모(貌)언(言)동(動))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다. 여기서 네 가지는 [맑은 생각, 엄숙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생각]을 말한다.

스승과 제자로 만났지만 그 두터운 정은 골육지친보다도 진하였다. 사제지간의 정이 이렇게 두터운 것에 조선역사에서도 보기 힘들다.

다산이 유배가 풀려 고향 마재로 돌아갔지만
다산은 황상과 편지로서 서로 교류를 이어나간다.
그 당시 교통이란 두 발로 걷는 방법밖에 없었다.

남쪽 마을 강진에서 경기도 마재까지는 보통 보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한번 길을 떠나면 수염이 덥수룩히 자라 몰골이 엉망이 되었다. 처음 황상이 스승을 찾아 걸음을 한 것은 다산의 회혼식 잔치를 앞둔 1836년 이었는데, 바로 18년만에 회후한 것이다. 이때 스승의 나이는 75이요, 황상은 49이었다. 당시 스승은 그를 [산석(山石)]이라 불렀으니 이는 산의 바위처럼 흔들림 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붙들고 살아온 것이다.
그토록 오매불망 기다리던 제자를 보았으니 기쁨이 오죽하였으랴.

다산 스승의 두 아들 학연과 학유와도 친형제처럼 지내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까지 이들은 서로 친형제 이상으로 지내면서 교우의 정을 나누었다. 황상은 평생 마재를 5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두터운 교분을 쌓았고, 추사 김정희 선생과 그의 친구 영의정 권돈인, 다(茶)성(聖)으로 불리운 초의 선사와도 교분을 쌓았다.

물론 정약용 사후에 항상은 상경하여 다산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추사가인 과지초당을 오고가며 양가의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황상의 시를 말하기를 “요즘 세상에 이런 작품은 없다” 라는 찬사를 보냈다. 황상은 50년이 넘도록 시성인 두보, 한유, 소동파(소식), 육유 등의 시를 익혔고, 정약용의 시를 계승하였다.(애절양, 승발송행).

황상의 시들은 상당부분 추사의 아들에 의해서 정리되기도 하고, 황상의 자제에 의해서 정리되기도 하였다.

제자 황상은 노년에 자신의 일생을 시로 노래하였다.


어린 나이 기연으로
다산 문하 받들었지
노둔함 안 따지고
큰 은혜 베푸셨네
큰 가르침 격식없어
조부가 손주 가르치듯
경전과 역사 펼쳐
수고로움 마다 않았지
가지에서 잎새까지
줄기 찾아 뿌리까지
때와 그릇 헤아리사
전원 훈계 주시었네
(*547쪽)



다산은 황상 제자에게 [삼근계]로서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명하였고, [치원]이라는 호를 남겨 주었다. 그 호의 뜻은 [치자의 정원]을 말하는 것으로서, 치자꽃처럼 향기를 발하되, 말없이 오래오래 공부에 정념하라는 뜻이다.

  • 다음 출처 이미지 - 치자꽃의 자태


이 책을 읽다가 [치자나무]를 재차 살펴보았다. 참으로 곱고 아름다운데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향기와 빛깔을 갖춘 정원의 나무였다. 치자의 꽃말은 ㅡ 한없는 즐거움이다.

시공부가 한없이 즐거웁고
시를 서로 나누며 우의를 다지는 일이 한없이 즐거웁다.
차자꽃이 정말 좋아진다.

치(巵)원(園) 황상(黃裳)을 보면서 크게 깨닫는 바가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훌륭한 가문에서 나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일까?
아니면 변변치 못한 집안이라도 근면과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일까? 이는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그의 나이 75세가 되어서 남긴 기록이 있다. 앞서 잠시 소개하였지만 다시 재차 확인하여 마음에 담아보기를 바란다.


“내가 산석(山石)에게서 문사(文士)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 것이요, 둘째는 막힌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이 세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데 있다. 둘째, 글 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황상의 임술기 중(中)>


황상은 83세에 죽었다. 그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책 읽기와 시를 짓고 초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서는 책을 베껴 쓰는 것을 말한다. 그는 벼슬자리 하나 얻지 못했던 시골의 선비로 살았다. 하지만 여전히 스승 다산과 제자 황상의 오랜 만남은 시와 기록으로 남아 있다.
황상의 <치원유고>와 <치원소고>가 그것이다.
최근에는 또 다른 황상의 시집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만남은 진정 맛남이다.”
독일의 시인 한스 카놋사가 말한데로 , “인생은 곧 만남이다.”

21세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유행하는 하나의 문화는 혼밥과 혼술, 그리고 혼행 등 혼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혼자서 여가를 즐기는 일이다. 이런 ‘solo'의 삶이 편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에게는 만남이 찾아와서 관계를 형성하는 일이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는 나름의 인연을 만들어간다. 하지만 애쓰고 노력해도 멀어지고 흐려지는 인연이 있고,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는 인연도 있다. 오랫동안 유지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해 서운한 관계도 있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를 다산과 그 아들들과 추사와 초의, 권돈인과 추사의 동생 김명희 등을 만나는 황상의 일화들을 보면서 크게 느낀다. 실제 향기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가...
삶을 통한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며 평생을 따르고 의지하는 인연은 정말 눈물겹고 아련하기만 하다.

스승이 지어준 호 치원을 소중히 여긴 제자 황상은 이런 시를 남긴다.


- - 다산의 고사를 추념하며

다산의 일들은 만 줄기 눈물
장건의 은하수 길 뗏못이라네
희미해라 진작에 꿈에 곡하니
황홀해도 허공에 핀 꽃이었을 뿐
절필은 황금 어이 귀하디 하리
절학가의 글자는 반쯤 비스듬
나무하는 손자도 내 뜻을 아니
힘써 배움 집안에 전해주리라.


만남을 가벼이 여기는 가벼운 인생들에게
이제 가르침과 배움으로 만나는 인연을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도록 당부하고 싶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다.
특히 그 인연이 혈연을 넘어설 때는 더욱 아름다운 일이다.

  • 구글출처 이미지 - 사제지간에서 가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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