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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왕, 사자의 세계사
사자(Lion)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동물중에 하나이다. 사자의 웅장한 용모를 보면서 ‘사자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품어왔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사자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사자와 같은 야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들었다. 사자가 한번 포효하면 산천초목이 쩌렁 쩌렁 울린다. 그래서 나는 사자를 ‘초원의 파바로티’라고 부른 적도 있다.
<사자의 수많은 명성(名聲)>
사자는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라틴어로는 레오(Leo) 라고 부른다. [라이온 킹]에 등장하는 사자는 심바와 레오다. 재미있게도 로마카톨릭 역대 교황중에 ‘레오’라는 이름을 가진 교황들이 있었다. 러시아어나 체코어로는 사자는 ‘레프’이다. 톨스토이의 원래 이름이 ‘레프 톨스토이’이다. 터키어로는 아슬란(Aslan)인데 현대자동차가 그 이름을 따왔다. 실은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사자왕이 등장한다. 그 사자왕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재미있게도 몽골어로는 ‘아르슬란 Arslan'으로 불리운다. 아랍지역에 가면 사자를 아사드(Asad)라고 부른다. 시리아의 대통령의 이름이 아사드이다. 이름이 그냥 사자다. 히브리어로는 아르예와 크피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스라엘을 부를 때 ’아리엘‘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것이다. 사자는 일단 왕자나 왕의 고품격 개념이나 상징으로 생각하면 더 좋다.
<사자에 대한 이미지>
사자는 무조건 용맹하다는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다.
특히 숫사자가 그렇다. 목에 정말 멋진 갈기를 가진 숫사자의 위용은 보는이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나게 한다. 그런데 숫사자는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고양이과 동물들의 특징이지만 약 20시간을 잠을 자며 게으른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숫사자가 사냥을 나가면 사냥실력은 뛰어나다. 숫사자는 암사자인 자보들이 사냥하게 하는 편이다. 이 숫사자들은 사자 무리의 왕이 그렇고, 세력당툼에서 밀린 사자는 떠돌이 사자가 되어서 자립적으로 사냥에 나가야 한다.
초원의 왕 사자는 암사자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암사자들이 열심히 사냥해 온 초식동물들을 가장 먼저 탐식하는 것은 숫사자들이긴 하지만 숫사자가 진가를 나타낼 때는 바로 암사자로는 감당이 안되는 하이에나 무리가 왔을 경우이다.
가끔 다큐를 보면 암사자들이 하이에나 무리에게 밀릴 때 숫사자가 들이대면 일방적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하이에나가 보통 5-60킬로 정도의 몸무게라면 숫사자는 이들에 비해 3배 이상의 무게가 나간다. 일단 덩치부터 넘사벽이다. 물론 사자는 사냥기술도 뛰어나지만 자신보가 훨씬 커다란 동물들도 사냥이 가능하다.
사자의 가장 큰 천적은 역시 인간이다. 동아프리카의 마사이족은 사자를 추격하여 사냥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러 아프리카 지역에서 사자사냥이 허용되면서 많은 사자들이 희생하자 이제는 사자사냥을 금지하고 있다.
<사자의 갈기>
사자는 예로부터 목 주변의 갈기가 멋지기 때문에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중세시대 십자군 원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재미가 있다.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리차드 1세의 별명이 [사자왕 Lionheart]이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왕이라는 뜻인데, 사자왕 리차드는 십자군 원정을 승리로 이끌며 예루살렘을 탈환한 인물이다.
사자의 갈기는 아마도 목을 보호하거나 아니면 몸집이 실제보다도 더 크게 보이는 효과를 이루어 다른 포식자들로부터 집단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숫사자가 사냥을 나가지 않는 경우는 바로 목의 갈기 때문에 움직이면 체온이 급격하게 높아져서 더운 날씨에 갑자기 급사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연구도 있다. 그래서 사자가 게으름을 피면서 빈둥빈둥 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기아차 프라이드?와 사자>
한국의 기아차 중에 아직도 생산하는 차가 있는데, [프라이드 Pride]가 있다. 이 프라이드의 기원이 바로 숫사자 1-3마리와 암사자 10마리 안팎으로 구성된 사자무리를 말한다. 고양이와 동물들이 대체로 단독생활을 하는데 반하여 사자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그래서 이 사자들이 다른 고양이과 동물들과 달리 거의 유일하게 공동체 의식이 강하며 사회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사자의 상징성은 성경과 불경의 덕분>
사자가 가장 강력한 육상 생물 중 하나로서 백수의 왕이라는 칭호와 이미지를 얻게 된 것은 상당부분 성경과 불경의 덕분이다. 불교에서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이 모든 짐승들을 위엄과 권위로 굴복시키는 제왕과 성인’의 상징으로 쓰였다. 그래서 흔히‘사자후(獅子吼)’ 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의 설법이 마치 사자의 포효처럼 뭇 악마들을 굴복시키는 위력이 있다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초기 불교의 경전인 ‘숫파니파타’의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구절에서는 깨달은 자 석가모니의 모습을 사자와 바람, 연꽃과 무소에 빗대어 설명한다.
<<유마경>>이라는 경전에 보면, “석가모니의 설법의 위엄은 마치 사자가 부르짖는 것과 같으며, 그 강설은 우레가 울려퍼지는 것과 같았다” 라고 한다. 사찰에서는 그래서 수호의 상징으로 사자상을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화엄사나 법주사, 불국사 다보탑)
티베트에서는 사자를 ‘상가이’라고 하는데 바로 달라이 라마의 옥좌를 가르쳐 [사자좌]라고 부른다. 불교국가중에 하나인 부국 싱가포르라는 도시국가가 있는데 이 나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바로 말레이어로 “사자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나라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자를 태양신의 상징으로 여겼다. 불가사의한 힘으로 왕의 위엄을 드러내는 동물로도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신전의 문과 피라밋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스핑크스]다.
이 영향을 아마 유대교나 기독교도 받았다. 이미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전지전능한 유일신 야훼(여호와)를 유대의 사자라고 표현한다. 야곱의 열두 아들중에 하나인 유다는 [웅크린 암사자]로 비유되었다.(창세기 49장)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쓰이지만, 보통 강력한 힘과 위엄을 지닌 숫사자의 이미지를 들어서 삼위일체(Holy Trinity)의 성부 하나님께 쓰인다.
성서에 보면,잠언 30장 30절에서 “곧 아무 것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동물의 왕 사자”라는 표현이 있다. 여기서 아마도 [백수의 왕, 사자]라는 말이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사사기(판관기) 14장 18절에는, “이레째 되는 날이 와서 삼손이 신방에 들려고 하는데, 그 성 사람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꿀보다 단 것이 어디 있고 사자보다 힘쎈 것이 어디 있으랴?“ 고 하고 있다.
성경에는 사자가 바로 동물의 왕이고 가장 힘센 동물인데 누가 여기에 대꾸를 하고 토를 달 수 있을까? 또한 잠언 19장 12절에는, “임금의 호통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고, 그의 웃는 얼굴은 풀 위에 내리는 이슬과 같다”라는 표현도 있다. 또한 20장 2절에는 “임금의 노여움은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아 그를 노엽게 하는자는 목숨을 잃는다” 라는 표현도 있다.
솔로몬이 지은 궁전이나 신전에는 사자를 매어 놓았다고 한다. 이것은 바빌론이나 페니키아이 풍습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다니엘이라는 사람은 사자굴에 들어가는 형벌을 받았는데도
사자들이 다니엘을 물어 죽이지 않았다는 대목도 등장한다. 아마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사자들을 대량으로 키웠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를 보면 고대 이스라엘 (가나안) 지경에도 사자가 흔하게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근대로 오면서 사자가 멸종한 것으로 보인다. 사자들의 존재가 아마도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커다란 영향과 환타지를 심었다고 보여진다.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이라는 C.S. 루이스의 환타지 소설을 보면 배신한 에드먼드의 죄를 대신해 죽은 후 부활하는 사자 아슬란이 나온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상징한다. 영국의 축구 국가대표팀이나 여러 가문의 문장은 사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강한 사자의 이미지가 있어서 마스코트로도 자주 도안되어지는데
한국의 경희대나 한양대의 상징동물이 사자이다. 예전 미국의 영화사 MGM의 마스코트는 사자이다. 거기서 출현하는 영화들은 항시 사자의 포효가 들어간다. 1957년부터 사용하여 아직도 사용중이다. 그 사자의 이름은 [레오]이다.
<사자가 등장하는 격언>
“사자는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라고 한다.
이 말은 예산에 가보면 추사 김정희 고택에도 쓰여 있는 말이다.
추사가 이런 말을 쓰셨다는 것을 보면, [작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항상 최선을 다하라]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 같다. 그런데 토끼라는 동물이 별것 아닌 동물이지만 그래도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하여 잡아야 한다. 예전에 고양이를 피해 도망가는 쥐를 보았는데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쥐를, 필사적으로 추격하여 기어코 잡아내는 고양이를 보았다. 별 것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서 사냥하는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호랑이나 표범도 아니면 늑대나 하이에나도 사냥할 때는 죽기 살기로 한다. 자기들보다 작은 동물을 사냥하는데도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다. 포식자들도 최선을 다해서 사냥을 해야 포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자가 과연 토끼를 사냥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데, 대부분의 사자들은 토끼를 자신들의 식단에 넣지 않는다. 사자가 그런 것까지 잡아 먹게 되면 생태계가 교란되거나 파괴되기 때문이다
사자는 사자다워야 멋있다.
<라이온 킹>
1994년 월트 디즈니가 만든 [라이온 킹 The Lion King]은 미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높은 흥행수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디즈니 르네상스]를 일군 작품이기도 하다.
그 줄거리는 창작 스토리로 세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래서 인문학이 필요하다.) 인격화된 동물들이 사는 아프리카의 한 왕국(프라이드 랜드)을 배경으로 하여 사자 심바가 왕으로 등극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다. 이 <라이온 킹>이 아카데미상과 골든 글로브상을 모두 수상한 작품이다. <라이온 킹>은 그 이후 3편이 나왔다. <라이온 킹>에는 엘튼 존이 작곡하고 팀 라이스가 작사한 다섯 개의 주제가가 들어 있다. 거기에 등장하는 곡중에 하나가 바로 [하쿠나 마타타 HAKUNA MATATA]이다. 이 곡이 유명해지자, ‘하쿠나 마타타’라는 아프리카어가 인기를 끌었다.
디즈니 영화의 강점은 바로 원작 스토리를 21세기의 감각에 맞게 과감한 변화와 혁신을 가미해서 만든다는 것이다. 디즈니 영화의 강점이 바로 [인문학에 대한 전폭적 수용]에 있었기 때문에 크게 성공한 것이다.
<사자가 이길까, 호랑이가 이길까?>
많은 수의사들이나 동물원 관계자들에게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바로 “사자가 이겨요, 아니면 호랑이가 이겨요?”
사자와 호랑이는 서로 자연계에서는 만날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슨 결과를 얻고 싶어한다. 실제로 어떤 동물원에서는 사자와 호랑이가 싸웠는데, 호랑이가 사자를 제압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소 사자는 초원을 좋아하고, 호랑이는 산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서로 부딪칠 일이 없다. 다만 사자는 사자대로, 호랑이는 호랑이대로 서로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능력으로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모두 승자로 남는 일이다.인간세계가 더 약육강식 의식이 더 강하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저 질문에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결론을 말해준다. “일단 강한 놈이 이긴다” 현실판 용호상박(龍虎相搏)이다. 인도의 뱅골 호랑이는 사자보다 덩치가 작다. 그래서 붙어보면 사자가 이길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다르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일반적인 사자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다. 아무튼 강한 놈이 이긴다.
<숲의 시대에서 초원의 시대의 돌입>
사자를 깊이 연구한 어느 경영전문작가가 있다.
여기서 이를 논하는 것이 주제에 적절치 않기도 하지만, 사자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지금의 세계는 “세계화 이전의 숲”이 아니라 세계화 이후 세상은 “대초원”으로 변해있다.
그 경영전문작가의 이름은 서광원인데, [사장으로 산다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책중에 <전략의 급소>가 있는데 그는 사자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그것을 기업계에 접목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 세상을 마치 동물의 왕국에 비유하고, 그 왕국의 왕이 사자인데, 이 사자의 왕으로서의 길을 이해하면 기업성공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바로 “사자의 어슬렁거림에서 성공의 법칙을 발견하라”? 라고 주장한다. 잠시 지면을 빌려서 소개한다.
사냥의 법칙 1 - 관찰하기 - 어슬렁거리면서 상황을 관찰하라.
사냥의 법칙 2 - 목표를 설정하라. - 자신의 역량에 맞는 적절한 목표를 정해라.
사냥의 법칙 3 - 목표물에 접근하라. -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힘을 잘 이용할 준비를 하라.
사냥의 법칙 4 - 승부에 집중하라. - 전략의 급소를 찾아서 단 한번에 공략하라.(필살기) 기업은 역량을 집중하여 실행력을 높이는 것이 최대의 성공요인으로 작용한다.
사냥의 법칙 5 - 마무리하라. - 성공한 후에도 겸손을 유지하라 그래야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또 다시 헝그리 정신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생존방정식은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전략의 급소]에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에서 부와 성공의 방정식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에게 사자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자가 백수의 왕으로 존재하는 생존방식이나 존재방식을 잘 이해하여 응용한다면 탁월한 효과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사자는 가젤보다 강한가?>
2004년부터 방영되는 <동물의 왕국>은 인기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탄자니아 세링게티 초원이 나오는데 수많은 야생의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동물의 왕국이라는 것은 마치 [사자의 왕국]이라는 왜곡된 고정관념이 생겨난다. 사자 무리가 가끔씩 얼룩말이나 가젤을 공격하는 사냥장면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뇌리에 사자가 각인되고, 우리 사회의 권력구조에 적용한다.
사람들은 “약육강식”이라는 것으로 강자는 항시 이기고, 약자는 항시 진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갖게 하였다.
사람들에게 육식동물은 무조건 강자이고, 초식동물은 무조건 약자
라는 이미지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미지화가 곧 정치나 경제에도 상당부분 침식되어 있다. 즉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은 육식동물에 비유되어 가진자이며 강한 자라는 인상을 갖고 있는다. 우리 같은 서민은 항시 힘없고 약한 초식동물에 비유된다.
그렇다면 정말 사자는 가젤보다 강한 걸까?
딴지를 걸어보자. 사자가 가젤을 잡아 먹는 것은 거스릴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다시 쓰는 동물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고 항변한다. 그 사람이 바로 최삼규 피디이다.
그가 수없이 많이 찍은 비디오를 보면, 확연한 자연의 질서를 보여준다. 낮잠을 자는 사자, 그리고 그 근처에서 편안하게 풀을 뜯는 가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수많은 초식동물중에서 겨우 1마리 정도만 사자무리에게 사냥을 당한다. 그것도 성공확률이 30%도 되지 않는다. 사실 생물학자나 동물학자는 진화론에 기초하여 생존경쟁, 약육강식,적자생존, 자연도태 라는 단어로 살벌하게 표현하지만, 자연은 초식과 육식 동물들이 서로 공존하는 공간이며, 적절한 [조화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그런 자연에는 갑질? 하는 강자도 없고, 그래서 당하는 약자도 없다. 오로지 섭리에 따르는 자연의 조화만 있을 뿐이다.
이를 보면 동물의 왕국은 사자가 이끄는 것이 아님을 본다.
공존의 힘과 자연의 섭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라이온 킹이라는 숫사자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라이온 퀸이라는 암사자가 지배하는 곳이 사자의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은 그렇다면 동물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세계의 질서라고 보아야 한다.
자연은 자연의 법칙대로 돌아가는데
인간은 왜 자연의 법칙을 외면하고 나름의 욕망의 법칙대로 살려고 하는가? 그래서 루소는 “인간들이여, 자연으로 돌아가라” 라는 말을 한 것 같다. 사자에게서 오늘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인문학속의 사자의 등장>
1.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위험한 책, 정말 위험한 책, 스스로도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면 인간 정신의 발달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세단계로 구분한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욕구하는대로 아무런 비판의식이나 성찰없이 살아가는 마치 낙타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당위적 세계의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은 사자처럼 스스로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힘을 지녀야 한다고 니체는 말했다. 니체가 말하는 독립적인 삶은 사자처럼 어느 무리를 떠나서 자신의 삶을 일구고 개척하는 의지의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뜻과 의지대로 살아가는 예속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독립과 자립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안정보다는 모험을 추구하는 자의 역동성이다.
그런데 니체가 바라는 궁극적인 단계는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게 유희할 수 있는 존재의 단계다. 이런 삶의 긍정과 부정, 선과 악, 미와 추를 넘어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성스럽게 긍정하는 경지이다. 이는 “강물의 더러움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는 더러워지지 않는 바다와 같이 인간세계에 살면서도 스스로는 더러워지지 않는 영적이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2. <노인과 바다속에 나오는 사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책은 정말 두고 두고 읽어도 좋은 책이다. 국문판에서 나중에는 영문판으로도 읽었는데 참 쉬운 영어문장으로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지면상 많은 부분을 말하기는 그렇고 오늘 주제에 맞게 가장 좋은 대목만 추려본다.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멕시코 만 바다에서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마침내 커다란 청새치를 낚는다. 작은 배에 청새치를 달고 돌아오는 길에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온다. 노인은 혼신을 다해 상어를 쫓아 버리고 항구로 간신히 돌아온다. 그러나 남은 것은 머리와 뼈와 앙상하게 남은 청새치의 잔해뿐이었다.
긴 투쟁의 낚시 여정에 지쳐 곤한 잠을 자며 노인은 사자의 꿈을 꾸고 있었다.(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왜 헤밍웨이는 자신의 소설에서 청새치와 더불어서 사자들을 여러번 등장시킬까? 아마 그는 젊은 날 아프리카에서 사자들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더 이상 폭풍이나 여성, 큰 사건, 큰 물고기, 싸움, 힘겨루기, 또는 아내의 꿈을 꾸지 않았다. 그는 지금과 해변에 있는 사자들의 꿈만 꾸었다. 사자들은 해질녘에 어린 고양이처럼 뛰었고 그는 소년을 사랑하는 자처럼 사자들을 사랑했다.”
“나는 그가 잠들고 나도 잠들어 사자를 꿈꿀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자는 왜 남겨졌을까?”
‘사자의 꿈’은 이 소설에서 3번 등장한다.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다. 청새치를 잡아 온 것은 그의 사자의 꿈이 이루어진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이루어보지 못한 꿈을 꾸는 것일까? 알길이 없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그후 62세의 일기로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오늘은 사자에 대한 임보의 시도 하나 남긴다.
사자와 사람
배부른 사자는
사냥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먹이를 쌓아 놓고도
투망을 던진다
아직 굶주려 죽은 사자는
지상에 없다
그러나
가장 많이 아사한 동물은
인간이다
사자는
제 몫만 챙기면
나누어 갖도록 두지만
사람은
곳간을 만들어
먹이를 가두기 때문이다
(임보·시인, 1940-)
인간의 탐욕을 다룬 이 시를 보면 나의 탐욕을 돌아보게 된다.
니체가 말한대로,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우리는 가야 한다. 사자꿈을 꾸어도 허무하다. 그저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소박해지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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