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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에게길을묻다 인문학산책
2부 - 방황의 기술 - 레베카 라인하르트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죽음이 어디에서 우리를 기달릴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디서든 그것을 기다리자“
- 미셀 드 몽테뉴의 [수상록 에세]에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생각하라는 라틴어 경구가 있다.
우리는 두 번 다시 없는 것 - 죽음에 대해서 묵상해야 한다.
플라톤도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많이 묵상하였다고 한다.
나는 아직도 젊다고 여기는 생각에 머물러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도 별 생각이 없다.
늙거나 늙지 않거나 인간이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은 언젠가 병이 들어서가 아니다.
거꾸로 우리가 유한한 생명체이기에 병이 드는 것이다.(198p)
얼마전 필자는 절친한 ‘모 연구소장’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몸에 고약한 암이 온 몸에 전이되어서 결국 두 번 일어나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살아있는 자는 슬퍼할 수 밖에 없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사자무언)
저자의 책을 보니까, 종교관을 설정해 놓았다.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과 혼란을 피하는 가장 큰 방법은
바로 종교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소멸이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죽음 너머의 세상이 있다고 믿거나 환생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로직도 논리학도 없다. 그저 믿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불안을 종교라는 것에 기대는 것이기도 한데,
사실 종교라는 것은 진리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뜬구름잡는 허상이다. 하지만 종교를 논리적으로나 개념적으로 설명하고 끌어들이는 것도 사실 맞지 않는다. 믿음은 과학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과학을 넘는 과학 - 초과학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분리이다. 또한 상실로 보는 것이다. 물론 우리 인생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간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미래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의 미래를 상실하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도 있지만, 사실 애석하게도 우리가 태어난 이후의 과거를 상실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밝힌다.
죽음은 우리의 미래를 상실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과거와 현재도 상실하는 것이다.
기계를 멈추기
아날로그 vs. 디지털
“고독, 다 알다시피
군중 속에서 우리를 덮칠 수 있는 이 악몽(nightmare)...."
- 한나 아렌트
페이지 221쪽을 넘어가면서, 흥미로운 부분과 만나다.
바로 인간의 문명이 만든 이기(획기적인 물건)에 인간은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늘 흥미진진한 새 소식을 보려고 시끄러운 기계를 향해서 손을 뻗는다. 요즘 최신형 휴대폰보다 완벽한 것은 없어 보인다. 소위 멀티미디어가 되었다.
그래서 철학자 들뢰즈는 우리 현대인을 ‘하이테크 인간’이라고 부른다. 하이테크로 무장한 인간들은 하이터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하이테크라는 것도 알고 보면 기계에 의존하는 병을 유발한다. 이를 [테크노 의존증]이라고 부른다.
컴퓨터 게임은 이제 세상에서 가장 많은 놀이가 되고 있다.
이는 현실을 시뮬레이션할 뿐만 아니라,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게 시물레이션된 현실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오가게 한다.
네덜란드의 요한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 라는 말로 인간은 문화와 신화, 종교의식, 그리고 그로부터 탄생한 온갖 종류의 기술과 예술에 의존하며 즐기는 존재,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그렇지만 현대인은 어떤가? 이들의 놀이방식은 지극히 네트워크적이다. 네트워크는 기술을 넘어서 이제 인간의 관계까지 지배한다. 인간관계도 결국 네트워크이다.
이제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겪는 것이 [정신분열화]이다.
들뢰즈는 말한다. “비일관성, 환청, 운동장애, 사회적 고립, 이 모든 것은 실제로 하이테크 인간이 겪는 정신분열화이다.”
인간은 실제 현실 너머에 있는 가상현실 기술이 만든 추가 현실에서 편안함을 더 느끼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현대문명이 만든 것에 안주하고 누리려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방황이나 방랑이 멈추게 된다. 이것은 마치 게임에서 말하는 [게임오버] 같은 일이다. 우리는 소중한 자신들을 위해서 반항하고, 반발하고, 저항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저자의 생각)
그렇지만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이기도 하다.
이 지구상에서 살아남은 족속인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오랜 방황과 방랑의 세월을 거쳐서 존재하고 남은 족속이다. 이제 우리는 기술적인 방황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이테크와의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하이테크와의 창의적인 관계를 맺지 않지 않으면 지금 시대와 더불어 앞으로의 시대에 살아남는 미래형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존재는 어려워질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을 거대한 놀이판으로 여기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펼쳐 나가야 한다.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아니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한다.”
- 노발리스
이제는 안정된 삶이라는 착각에 대해서 저자는 논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하지만 그런 일탈의 순간은 가끔씩 온다.
저자는 <<필경사 바틀비>> 라는 허먼 멜빌의 소설을 책속에 등장시킨다. 책속의 바틀비는 유능한 필경사로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엄청난양의 서류를 필사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공증인의 명령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는 법률회사의 대표로부터도 일의 규칙성, 근명성, 팀워크를 존중하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그는 단호한 표준 대답을 한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필경사 바틀비는
일상이라는 무서운 아니 무거운 현실의 지속성에 질린 것이다.
그에게 일탈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는 단호한 어투로 일상을 탈출한다. 하지만 일상의 탈출은 곧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 또는 시장원리라는 것에 동참하지 않고 거기를 박차고 나가는 쪽을 선택한다. 그것은 마치 자유를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도 외판원인 고레고르가 등장한다. 그레고르도 바틀비와는 달리 극도로 책임감이 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불안한 잠에서 깨어나니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었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사정이 극도로 나빠지면서 사랑하는 여동생도 그를 외면한다. 나중에는 그레고르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 올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린다.
사람들은 잠을 자고 깨는 존재이다.
그런데 깨어나면 사람들은 내일도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것은 일종의 [귀납법칙이며, 자연원칙]이기도 하다. 하지만 프란츠 카프카는 이 소설에서 이를 무시한다.
“꿈은 상상이 따라잡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낸다” - 카프카
<필경사 바틀비> 나 <변신>은
우리가 상상력의 한계선만 아니라 행복의 한계선 아래로 데려간다. 우리에게 영원히 안정된 삶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불안과 부조리에 시달리는 존재이다. 자고 나면 우리는 도시인의 삶의 일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시장원리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인간다운 삶에 대한 지독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일상의 철학자 되기
인간답게 사는 것에 관하여 - 비트겐슈타인과 레비나스
일상생활에서 바쁘게 사느라 우리는 잊고 있던 질문들이 많다.(페이지 270)
“난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근원적 질문들이다.
철학에 빠져들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삶이 복잡하고 막막할 때, 뭐가 뭔지 모를때, 혼란스러울 때, 삶 자체가 우리를 철학자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우리와 철학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철학자들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요.
다른 이들보다 궁극적인 삶의 질문들에 모든 대답들을 준비하려고 노력한 천재들이다.
철학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로는
플라톤과 칸트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다.
이들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이해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였다.
철학의 문제는 사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라는 데서 생긴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소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나’ 자신의 윤리적 의지로부터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 답은 당연히 말이 아닌 행동으로 찾아야 한다.(페이지 277)
또한 일단 우리는 살아 움직이며 실천해야 철학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철학공부나 자아도취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이다.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라는 것을 마주치게 된다.
앞에서 우리는 소위 낯선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도, 무관심해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했는데, 타인이라는 것은 바로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타인을 향하여 우리는 말로 되지 않는 것은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 책은 에필로그에서 다시 오디세우스를 등장시킨다.
오딧세우스는 10년간의 방랑을 마치고 마침내 이타카의 해변에 도착한다. 그 사이에 고향은 크게 변하고, 자신도 고향을 제대로 알아보지는 못한다. 그리고 결국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나고, 아내 페넬로페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들의 정적들이나 대적들을 다 주살하고 질서를 회복한다.
그 과정에 대한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오딧세우스는 예전의 오딧세우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같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 글을 읽고 당장 오딧세우스를 읽어보라.
험난한 방랑과 방황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으며,
힘들고 낯설은 세월을 친숙한 세월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에게 자신이 뿌리에 대한 기억이 그를 다시 고향으로 오게 한 것이다. 자신의 고향, 가족, 그리고 아들과 아내에 대한 그 관계 때문에 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이기고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페이지 299)
오늘날 우리들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오딧세우스처럼 그런 정체성의 뿌리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가?
요즈음에 아무도 어떤 가치를 위해서,
어떤 의와 동경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 말해주는 이가 없다.
그것을 가르쳐주는 인생학교도 없다. 좋은 아빠가 되는 학교, 좋은 남편이나 아내가 되는 학교는 없다. 그저 우리는 살면서 배우고 익힐 뿐이다. 잘못배우면 잘못 행한다.
그러나 어디가 우리의 고향이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 무엇과 관련을 맺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무척 힘이 든다. 세계화의 시대, 우리의 문화적 뿌리는 낯설어졌다. 우리는 근원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이 정말 위기라면 위기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다. 이제 우리는 21세기 기술적 방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과거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뿌리를 찾아야 한다. 바로 나는 거기서 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삶은 살아야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연구하고 인식하고
설명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신화와 예술 작품, 그리고 그리스의 천재적인 발명품인 철학에서 만나게 된다.“(페이지 301)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터넷과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여전히 추구해야 할 소중한 것들을 신화와 예술 그리고 철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본다. 바로 이러한 것들은 인간의 방랑과 방황의 흔적들을 너무나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방황의 기술, 여행의 기술, 삶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있다. 예술과 철학은 이제 삶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저자의 결론이 사뭇 예사롭지 않다.
지금도 우리는 스토아적인 삶을 추구하기를 강권한다.
스토아적인 삶, 스토아 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생각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간성(후마니타스)과 덕(아레테)을 추구하고 소유 대신에 존재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비단 스토아주의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방랑자이다. 거룩한 방랑자이며, 생각하는 방랑자이다. 이 방황의 시작과 끝은 이렇다.
첫째,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는 자각이다. (맹자를 이를 평상심이라고 불렀다.)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현존의 목표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면 자신의 운명을 정할 수도 없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명상록>>중에서
둘째, 우리는 인생 목표에 도착하는 속도보다는 인생 목표에 도달할 것이라는 의지와 방향이 중요하다. 우리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샛길과 거친 길이 우리를 있게 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코엘료 말대로 삶은 확실히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셋째, 인생의 의미는 위기와 실패라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매일 현재를 살 것이며, 매 순간이 마지막 일 듯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자.
매일 매일이 우리가 세상에서 만난 첫날 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어떨까?(페이지 308)
넷째, 우리는 무엇인가 항상 결핍과 부족함을 느끼면서 지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삶의 지혜를 준다. 우리는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감을 따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극의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으로서 자신을 던지는 것과 같다. 살면서 우리는 이러한 수많은 관객들을 본다.
아직도 우리는 주저주저 하면서 자신의 배의 돛을 달지 않는다.
인생은 항해와 같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의 배를 항구에 묶어 놓는다.
노벨상 작가 버나드 쇼의 비문을 보면,
“우물 쭈물 거리다가 내 그럴 줄 알았지” 라는 웃픈 대목이 나온다.
우물 쭈물 거리다가 인생 허비하고 가는 이들이 오늘도 많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노예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자유민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노예(속박받는 이)가 되는 것은 자유가 두려워서 스스로를 가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세계시민’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정신적 자유를 누릴 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나는 아테네 시민도 아니고, 그리스 시민도 아니고, 나는 세계시민이다”
수천년전 오딧세우스의 거친 바다로 항해하는 호기심과 용기가
인문학적인 도전이었다면, 우리도 인생의 바다로 항해하는 호기심과 용기로 무장하는 것은 정말 멋진 인문학적인 도전이 될 것이다.
어느날 인생 길에 ‘왜’가 서 있다면
피하지 말고 그 질문과 함께 가보자.
헤매고 방황하는 이에게만 보이는 길의 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생이란 미리 알고 가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길을 모르는 사람이 제대로 된 길을 찾으려면 반드시
‘방황’을 기꺼이 즐거운 마움으로 해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경구를 남긴다.
중요한 것은 여행이다. 목적지가 아니다...
(로뎅이 릴케에게 준 아포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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