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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길묻29, 셰익스피어 [리어 왕] 명작 읽어내기

by 코리안랍비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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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 포럼의 발표문 수정>
  • 구글출처 이미지 -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King Rear


원래 나는 대학을 영문학과에 진학하고자 하였다.
고등학교시절에 읽었던 토마스 하디의 [테스]에 대한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서, 셰익스피어의 ‘6대 희극과 4대 비극’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문학 선생님의 권고가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던 그의 작품 중에 하나인 4대 비극중 하나인 ‘햄릿’을 읽어보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경영학과를 들어왔다.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더 좋았던 것 같다.

나는 교양으로 영문학과의 ‘셰익스피어 강좌’를 수시로 들을 수 있었던 특권이 생겼기 때문이다. 영어를 무척 좋아하고 나름 잘했던 나는 셰익스피어의 영어작품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많다. 영문학과에는 유일한 불멸의 강좌가 있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강좌’이다. 다른 강좌들은 폐강은 하여도 셰익스피어 강좌만큼은 전혀 사그러지지 않는다. 그것도 전세계의 수많은 영문학과에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태주 단국대 영문과 교수는 그를 [불멸의 영광을 누리는 영원한 동시대인]이라고 칭했다. 당시에 나는 영문학과에서 ‘햄릿’수업을 받았다. 그래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인간,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생각은 신과 같고
이해는 천사와 같다.
세계의 미요, 만물의 영장이로다.”

이 대사들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언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놀라운 사실이 하나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사랑하는 외아들의 이름이 바로 '햄릿'이다.
1596년에 외아들인 '햄릿'을 잃고 그는 비극 [햄릿]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밝힐 리어 왕은 셰익스피어가 느꼈던 고통과 상실이 그대로 전이 되는 알터 에고( Alter Ego)를 보여준다.

  • 구글출처 이미지 - 연극 리어 왕은 오래전에 본 기억이 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들은 별로 없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도 그 줄거리도 제대로 기억도 못한다. 셰익스피어는 원본은 고사하고 번역본도 읽어내기 힘들다.

독일하면 문호 괴테를 떠올리고, 영국하면 문호 셰익스피어를 떠올린다. 그런 유명하고 저명한 인물의 책을 읽어볼 염두도 못 낸다는 것은 대학을 나온 지성인들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고도 생각된다. 나의 인문교양실력은 사실 대학때 누렸던 풍성한 독서의 향연 덕분이다.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두루 읽을 수 있었던 기회는 바로 대학 도서관이 제공하였다.

당시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그래도 책값을 아끼지 않았다. 아버지의 어록중에 하나는 “밥값과 책값은 아끼지 말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밥값과 책값은 그리 아까워하지 않는다. 다른 부분에서 절약해서라도 먹고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대의 용트림은 50대가 되어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는 최근에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다시 구입하였다. 대학시절에 읽었던 1991년도판 범우사의 4대 비극은 여전히 서재에 보관중이다. 책을 버리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아직 온전히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그리고 ‘난생처음 도전하는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이라는 박용남 교수가 지은 작품을 새롭게 구입하였다. 비극에 대한 번역실력이나 강의실력이 최고인 박용남 교수의 책을 만지면서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나의 글은 셰익스피어의 최고 비평가인 브래들리의 말로 시작한다.

“셰익스피어의 능력을 가장 훌륭하게 보여준 작품은 단연 리어왕이다”
나는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어휘 그리고 은유(메타포어)는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서 전개되는 변화의 흐름을 포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인상을 받는다.

[리어왕]은 선악의 영원한 테마를 토대로 하여, 인간의 여러 성격을 병적이며 심리적인 측면에서 규명하고, 인간성의 그로테스크한 비극을 이보다 잘 예술적으로 교묘하게 그려나가 극작품은 드물다. 리어 왕의 성격은 작품의 핵심을 이루고, 그 왕의 성격은 여러 사건들 속에서 그 성격과 함께 파멸되어간다.

성격은 영어로 Character이다. 캐릭터는 등장인물을 말하기도 한다. 성격적인 등장인물의 모습을 통해서 독자들이나 관중들은 감동을 받기도 하고, 열 받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슬프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리어 왕의 일관된 성격인 박약한 의지와 맹목적인 아집은 선의 힘을 쇠퇴시킨 동시에 악의 힘에 의하여 압도당하고 큰 피해를 입는다. 선과 악의 투쟁속에서 극중에 가장 현명하고 이지적인 막내 딸 ‘코델리아’의 죽음은 마치 [세계의 해체와 붕괴]를 보여주는 비극의 압권이 된다. 코델리아의 죽음을 통해 리어 왕은 정화되어가면서 도리어 비극의 위대성이 회복되는 경험을 한다. 무엇인가 해체는 새로운 생의 의미를 찾게 하는 힘이나 모티브가 된다.

리어 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말 삼척동자도 알아듣기 쉽게 나의 글을 전개한다.


어느 영국의 브리튼에 어머어마한 부자 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어’이고, 그는 마치 대기업 CEO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 왕이 어느 날 난데없이 자신의 세 딸을 불러 모으고, 묻는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마도 그는 아들이 없는 왕이었던 모양이다.

“너희들이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보아라. 그 사랑의 크기에 따라서 내 재산을 물려주겠노라” 라고...

사실 나이도 많이 들고 많은 것들이 힘에 부친 왕은 이제 왕의 칭호만 유지한 채 홀가분한 몸으로 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남은 여생을 편하게 지내려는 맘이었다. 이른바 편안한 노후를 위한 은퇴 선언을 하려던 참이었다.

첫째와 둘째 딸들은 아버지가 원했던 정답을 말한다. 아마도 아버지가 듣고 싶은 말을 제대로 골라서 최대치의 표현으로 말한 것인데 그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두 딸인 고네릴과 동생 리건의 말은 그렇다.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저는 언이의 말에 부족한 부분을 덧붙여 말하겠습니다. 저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는답니다.”

두 언니들의 아부가 극에 달한 말에 막내 딸 코델리아는 긴장을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 리어 왕을 진심으로 사랑한 코델리아는 아무런 아부를 떨지 않는다.

“아버님 불행히도 저는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에 올려 말할 줄 모릅니다. 저는 아버지를 딸로서 마땅히 사랑합니다 그보다 더도 덜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리어 왕은 세 딸들을 놓고서 벌인 사랑 경연 대회에서 고너릴과 리건의 몫을 주지만, 막내 딸에게도 다음과 같이 사랑고백을 할 기회를 준다. (1막 1장)

리어 : 언니들 것보다 더 비옥한 삼분의 일을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말을 말하라.
코델리아 : 없습니다. 전하
리어 : 없습니다?
코델리아 :없습니다.
리어 :없음은 없음만 낳느니라. 다시 해봐
코델리아 : 소녀 비록 불운하나 제 마음을 입에 담진 못하겠습니다.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나는 그녀의 다른 대사에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

                                                                  키이나 나이틀리 ㅡ 코델리아역 / 구글출처 이미지



“아버님은 저를 낳아 기르시고
사랑해 주셨기에
전 그에 합당한 의무로 보답코자
복종하고 사랑하며 가장 존경합니다.
언니들이 아버님만 사랑한다 말할 거면
남편들은 왜 있지요?
제가 만일 결혼하면
제 서약을 받아들일 그분은 제 사랑과
걱정과 임무의 절반을 가져갈 것입니다.
전 분명코 언니들처럼 아버님만 사랑한다는
결혼은 절대로 않겠어요”(1막 1장)


리어 왕은 코델리아의 사랑의 진심을 오해한다.
오해가 결국 저주로 변한다. 그 대사를 여기에 옮긴다.

  • 구글출처 이미지 - 코델리아 연기를 하는 여배우

코델리아의 모습

“그럼 네 진실이 네 지참금이다.
왜냐하면 태양의 성스러운 광명과
헤카테의 비밀 의식과 밤에게 맹세코
우리가 존재하고 없어지는 근원인
저 모든 천체들의 영향에 맹세코
근친 혈연관계를 여기에서 부인하고
지금ㅂ무터 영원히 너를 나와 내 마음의
이방인 취급할 테니까...
스키타이 야만족,
아니면 자신의 식욕을 채우려고
제 새끼를 잡아먹는 놈이라도 내 가슴엔 지난날의 딸 자식
너만큼 가까울 것이며 내 동정과 구원을 얻으리라.“(1막 1장)


이 엄청난 저주의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까?
이게 아버지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리어 왕은 제 새끼를 잡아 먹는 야수보다 더 가혹하게 코델리아를 대하는 선언이다. 이 정도면 너무나 비참하다. 읽는 이로서는 짜증 곱빼기를 먹는 기분이다.

위의 말은 리어 왕의 파괴적인 절대 부정의 힘과 다가 올 광풍과 선악의 투쟁과 생사의 고통이 비극적인 결말로 다가오게 하는 말이다. 결국 그의 말대로 실현된다.
막내 딸 코델리아의 대답에 화가 난 리어 왕은 코델리아에게 아무런 지참금도 주지 않고 프랑스 왕에게 시집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충신 켄트도 리어왕에게 ‘고정하라’고 말하지만 화가 난 리어 왕은 켄트 마저 버리게 된다.
이 장면은 이 비극 전체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말이다. “없습니다.” 코델리아의 이 말은 ‘사랑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다’라는 것도 보여준다.


리어 왕은 오직 ‘있음’과 ‘허황된 긍정’으로 살아왔다.
그런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한 것은 막내 딸이었다. 두 딸들은 아버지의 재산에 눈이 멀었지만, 막내 딸은 아버지와 딸이라는 사랑의 연결고리에 순수하게 묶여 있었다.


리어 왕은 그래도 사랑한 막내 딸에게도 권력과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의 재산은 고네릴과 리건에게 나누어주고, 매달 번갈아가면서 두 딸들의 성에 머무르겠다고 말한다.

그런 왕의 모습에 또 다른 충신인 글로스터 백작이 있었다. 리어 왕은 아집과 독선에 가득차 그의 말도 도통 듣지 않는다. 이제 많은 이들이 상상한 것처럼 이야기는 급격하게 내달린다.

아버지의 돈을 전부 상속받은 두 딸의 맘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떠올리는 것은 “부자에게는 자식은 없고 상속인만 있다”는 탈무드의 말이다. 아들이나 딸이라는 가족개념이 상쇄되고 그저 상속자의 권리가 부곽이 된다. 그러면서 어느새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법적 관계에서 이상한 관계로 흘러간다.


고네릴과 리건은 결국 아버지를 슬슬 피하기 시작한다. 관계가 뒤틀리기 시작하고, 어느 덧 대담해진 두 딸은 아버지를 대 놓고 싫은 척을 하게 된다. 사이가 벌어지고 틈을 벌어지게 되는 갈등구조로 바뀌게 된다. 리어 왕도 이런 딸들의 모습에 대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상속을 준 딸들에게 왕은 복수할 수 없다.


어느 날 자신을 매몰차게 불편하게 만드는 큰 딸 고넬린의 하인에게
리어 왕은 화를 내면서 물어본다.

“내가 누구냐?”

이에 대한 하인의 대답은 이 모든 상황을 대변한다.

“네 제 주인마님이 아버님이십니다”

두 딸들에게 상속 재산을 준 아버지는 순간 권위도 권력도
모두 잃은 늙은 사자에 불과해진 것이다.
이제 리어 왕은 배신한 두 딸에 대한 복수지심이 생기게 된다.


제 4막 6장에 다음과 같은 리어 왕의 대사가 나온다.

“죄악에 황금의 갑옷을 입히면
날카로운 정의의 칼도
상처를 내지 못하고 부러져버린다.
그러나 죄악을 누더기로 무장하면
난장이의 지푸라기로도 꿰뚫을 수 있다.”

마치 영화 ‘홀리데이’에서 나온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대사와 비슷하다.

그러면 세 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 글에서 물론 다른 충직한 신하인 글로스터 백작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만
나는 세 딸들에게 더 집중하겠다.

결론적으로 두 딸은 죽게 된다.
큰 언니는 동생 리건이 탄 독약을 마시고 죽게 되고, 리건은 스스로 자결한다. 많은 상속재산을 받았지만 이들은 권력투쟁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에서 결국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 완전 콩가루 집안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코델리아’는 어떻게 될까?
리어 왕을 돕는 신하들이 프랑스에 있는
셋째 딸 코델리아에게 사정을 말하고 프랑스 군대가
도버해협을 거쳐 영국으로 쳐들어와 한바탕 일전을 치룬다.

나는 이 대목에서 셰익스피어에게 따지고 싶다.
코델리아가 프랑스 왕의 왕비가 되었으면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글로스터 백작의 아들인 에드먼드에게 패배를 하게 된다.

결국 셋째 딸 코델리아와 리어 왕은 사로잡히게 된다. 결국 코델리아는 죽음을 당하고, 리어 왕은 충격을 받아서 오열하면서 죽는다. 해피 엔딩이 아니라 해피 앤드가 된 것이다.

리어 왕의 비극은 결국 본인이 자초한 비극이다.
나는 이 비극을 읽다가 화가나지 않을 수 없었다. 권선징악 구조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가족 전체가 죽어가는 것은 정말 읽는 독자에게 ‘허탈감’을 안겨 준 것이다. 희망마져도 어둠으로 만들어 버리는 셰익스피어의 ‘잔인함’을 보았다.

“셰익스피어 양반, 당신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죽이고 나서야 그제야 만족을 하시는군요. 정말 너무 하십니다”

셰익스피어는 천(千)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신들이 정당하다면 코델리아의 목숨을 앗아가서는 안되었다. 나는 그녀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바라였다. 그러나 리어는 코델리아의 죽은 몸에서 삶을 본다. 흙처럼 죽은 그녀에게서 깃털을 움직이는 숨결을 보고, 죽음의 침묵 속에서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창백한 그녀의 입술에서 생명의 붉은 빛을 보라고,
“여길 봐, 여길 봐” 라고 외치면서 그도 죽는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것은 코델리아였을까?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는 것일까? 그런 짧은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죽음의 불가역성에서 결국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비극중에 비극이라는 것을 나는 건졌다.

인간은 결국 죽는다. 나도 죽고, 당신도 죽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으려면
적어도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도록 해야 한다.
그것도 진실한 사랑으로 채우도록 해야 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코델리아만 같기를 바란다.

지금 아니면 언제?
사랑할까 ~~

내가 아니면 누가?
사랑할까~~

  • 구글출처 이미지 - 모두가 죽어버리는 비극 중의 비극 - 리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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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잔인한 비극 - 리어왕 - 셰익스피어 잔인한 작가?로 인식하게 만든 비극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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