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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학에 대한 두 가지 칼럼 정성구 전총장과 김월회 교수

일류를 만드는 생각의 차이

by 코리안랍비 2025. 6. 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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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대학 정성구 전총신대, 대신대 총장 칼럼

하버드 대학교는 아이비리그에 속한 최상위 대학이다. 하지만 미국의 대학 순위를 매기는 Best US. news의 보고서를 보면, 지난 10년간 하버드 대학교가 미국 대학교의 1위 자리를 차지한 것은 한 번도 없다. 2023년의 대학 순위도 1위 프린스턴 대학교, 2위는 MIT, 3위가 하버드 대학교이다. 한국 사람은 유별나게 명문대학교로 하버드를 선호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는 최고의 교수진과 수재들이 몰려오고, 다양한 대학원 프로그램이 있어서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미국의 한인 2세들도 동경하는 대학교이다. 하지만 대학교는 저마다의 특색이 있고, 특성화 교육이 있는가 하면, 어느 대학교에 노벨상을 받은 세계적 석학이 있는가가 중요하다.

 

이공계로는 MIT가 최고라면, 프린스턴 대학교는 인문, 사회과학, 기초과학이 세계 최고이다. 그러므로 명문대학교라고 할 때 어느 한 분야만 볼 것이 아니고, 각각 나름대로 특색이 있고, 세계적으로 우수한 대학교들이 널려 있다. 조사기관과 기준에 따라서 순위도 왔다 갔다 한다.

 

명문대학교를 졸업한 대표로는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학력이 최고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 학사, 하버드 대학교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Ph. D) 학위를 받았다. 지금까지 미국 대통령들의 면모를 살펴봐도 이승만 박사 같은 스펙을 가진 대통령은 없다. 한국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의 대통령이나 총리 중에도 이승만 박사와 맞먹을 학문과 지식을 가진 자는 없었다. 이승만은 국운이 쇠하고 나라가 박살 날쯤에 조선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사형수에서 종신 죄수로 살다가 57개월 만에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한성 감옥은 이승만에게 새로운 민주주의의 꿈을 향한 준비 기간이었다. 어찌보면 한성 감옥의 6년 가까운 세월이 그에게는 명문대학이 된 셈이다. 거기서 그는 영어에 통달했다. 그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신진 문물을 알리는 책들을 탐독했고, 성경을 읽고 신앙의 사람, 확신의 사람으로 거듭났다. 감옥에서 읽고, 쓰고, 기도하고, 명상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독립정신> <일민주의> 등을 저술하고 독립신문에 기고를 했다. 이승만은 사상가요, 독서광이요, 저널리스트이자, 언어학자요, 연설가요, 설교가였다. 그는 한성 감옥이 절망의 장소가 아니라, 영성이 깨어나고 지성이 쌓여가는 신학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성 감옥에서 출감하자 평양의 남궁혁씨 댁에서 얼마간 보양을 했다. 남궁혁의 조부는 평양감사를 지냈기에 집도 넓고 풍족했다. 바로 남궁혁은 후일 미국 유학을 하고 평양신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이승만을 그리로 인도했다.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추천장을 많이 받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어학 실력과 천재적 머리로 그 대학을 단숨에 마쳤다. 그가 배재학당에서 공부했으니, 배재학당은 영어로 PeJe College였으므로 상당수의 학점을 인정받았다.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다닐 때, 이승만은 워싱턴 시내에 있는 언약도 교회(Church of Covenant)에 출석했다. 그리고 그 교회 담임 목사인 햄린(Lewis Hemlin)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을 졸업했고, 감리교 지도자로 살아온 것은 맞다. 그러나 이승만은 스코틀랜드 정통 장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사실 평양신학교를 세운 마포 삼열(Samuel A. Moffet)도 정통 장로교인 언약도의 후손이다.

 

어쨌거나 이승만에게 신앙지도를 하고 세례를 주신 헴린 목사는 지금부터 120년 전 미국 동부의 정신적 지주요, 대 지도자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하버드 대학교 이사장겸,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이사였다. 그는 청년 이승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잘 인도했고,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버드 대학교를 마친 후 그는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대학교로 왔다. 그런데 이승만은 처음부터 정치학을 공부한 것이 아니고, 1년간 신학교에서 공부했다. 프린스턴 신학교는 당대 최고 학자인 비.비 월필드(B. B. Warfield) 박사가 인도하고 있었다. 거기서 이승만은 변증학과 바울신학, 그리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당시 학교의 분위기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영역주권 사상>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승만의 가슴 속에는 만약 조선이 독립 국가가 된다면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독 입국>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선포되던 날, “이윤영 의원 앞으로 나와서 기도 인도해 주십시오. 여기 의원들께서는 믿는 이도 있고, 안 믿는 이도 있겠지만 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라고 했다. 이것이 대한민국 기독 입국이 되던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 세상의 명문대학을 나온다고 모두가 인생을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멘토를 만나서, 얼마나 큰 열정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 때문에 지성보다 중요한 것은 인성(人性)이고, 인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덕성(德性)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성(靈性)이다.

명문대학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명문대학을 만들면 된다.

[출처] 기독교 일간지 신문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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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월회 칼럼] 명문(名門)의 조건

 

입력 

2017.10.16 14:46

 

 

명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우리나라에도 명문이라 불리는 대학이 있다. 그런데 과연 명실상부한 명문대학일까, 아니면 성적 상위권 학생이 간다고 하여 불리게 된 상위권대학에 그치는 걸까. 범위를 지구촌으로 넓혔을 때 세계적 명문이라 내놓을 만한 대학은 얼마나 될까.

 

아니, 그런 명문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명문대학은 중등교육과정 성적 우수자가 대거 입학한다고 하여 그냥 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는 말이다. 그 대학 졸업자가 사회 각계 요로에 많이 진출한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건 더욱더 아니다. 적어도 다음 두 가지만이라도 갖추고 있어야 그나마 되고자 할 수 있는 게 명문이다.

 

하나는 대학 구성원의 탁월함(arete, ἀρετή 아레테)이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가 본령이므로 당연히 교수와 학생이 탁월해야 한다. 그런데 교수에게 요구되는 탁월함과 학생에게 요구되는 탁월함은 서로 다르다. 학생의 탁월함은 주지하듯 시험 고득점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탁월함이 현재적으로 발현되어 있는 경우와 탁월함을 갖출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경우로 나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수는 적어도 자신이 현재적으로 탁월한 동시에 타인이 지닌 잠재력을 보아낼 줄 아는 탁월함도 동시에 갖춰야 한다. 잠재력은 있지만 중등교육을 마치는 단계에서는 그것이 아직 발휘되지 않은 인재를 보아낼 줄 아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처럼 이미 수월성이 입증된 학생을 주로 받아들이고, 이들이 알아서 커서 졸업하게 된다고 하여 명문임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명문은 탁월한 이들이 거쳐 감으로써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탁월함을 갖추게 해주고 더욱 진보케 해줌으로써 증명된다. 입학하기 전에 비하여 졸업할 때는 분명 뭔가 더 나아진 바가 있어야 하며, 그러한 진보가 대학에 의해 추동되고 실현됐을 때 비로소 대학이 무언가 역할을 했다고 주장할 수 있기에 그렇다.

 

나아가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자신의 현 상태만으로는 탁월하다고 할 수 없어도 남과 결합되면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거나 남을 탁월하게 만들어내는 경우도 엄연히 탁월함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문의 필수 조건은 학생을 탁월케 하는 탁월함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음과 동시에 타인과 협업함으로써 모두가 탁월함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역량도 기본으로 갖추고 있음이다. 이러한 기본이 튼실한 대학이 곧 명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잠재력과 협업 역량을 지닌 재목을 가려낼 수 있는 교수의 역량이 대학 차원에서 제도화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대학은 이를 갖추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대학의 연구역량을 집중시켜 연구해야 한다. 지금처럼 국가의 공적 권위에 기대 일직선으로 줄 세워진 학생 중 상위권을 선점하는 경쟁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대학이 지녀야 하는 탁월함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입학생 평가와 선발제도는 정부 주도로 놔두고 정책 제안이나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좋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을 대학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지향하는 바에 맞도록 설계해가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개입해야 하는 선이 있다면 그건 중등교육과정까지여야 한다. 전국 단위의 통일된 시험이 필요하다면 그건 고등학교 졸업자격고시여야지 대학입학시험용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도 국가교육위원회와 같은 중립적 기구가 해야지 마땅히 없어져야 할 교육부가 주관해서는 안 된다. 고등연구와 마찬가지로 고등교육을 정부가 관리하고 통제하겠다는 개발도상국 시절의 발상은 진작 내려놓았어야 한다. 우리 국력과 국제적 지위가 개도국 수준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지만 정책은 관료주의와 무능, 몰개념에 젖어 개도국 수준서 나온다면 어떻게 평화롭고 풍요로운 선진국형 인문사회를 구현해갈 수 있겠는가.

 

명문으로서 갖춰야 하는 또 하나의 조건은 제 3자가 그 대학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점이다. 탁월함은 자기가 주장한다고 하여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대학의 존재 이유가 사회적 차원에서 비로소 정당화되는 한, 대학의 탁월함은 제3자들도 고개를 끄덕일 때 비로소 공인될 수 있기에 그렇다. 이를 위한 노력은 어디까지나 대학의 몫이다. 대학 스스로가 자신의 탁월함이 공동체에게 선물이 되도록 실천하고 지역사회 교육복지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국가의 선한 진보와 풍요 구현에 원동력이 돼야 한다.

 

이는 당위나 목표가 아니다. 명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 출발점은 교수가 저마다 연구 탁월성을 갖추는 것이다. 흔히 교수가 응당 행해야 할 바로 교육과 연구, 사회봉사를 든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학술을 기반으로 수행돼야 한다. 그랬을 때 양질의 교육에, 공동체의 선하고도 풍요로운 진보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대학의 탁월함이 제3자에겐 실질적 이익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대학을 제3자가 굳이 자랑스러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아니, 질시해도 뭐라 할 수 없는 게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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